雜記/이 생각 저 생각

고향집 어머니

펜과잉크 2009. 4. 20. 13:41

 

 

 

 

 

 

종교와 신앙 따위를 믿지 않는 나로선 오직 부모님만이 최고다. 사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은 역사관에서 고증된 인물일뿐, 그 분들이 내 부모님보다 위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어머니는 훌륭하신 분이다. 비록 칠순의 중반에 이르러 뇌경색으로 고생하시지만 여전히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난 분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며칠 전에도 실감했다. 아버지 49재 때 첫째아우의 옷차림에 대해 어디에 쓴 게 문제되어 어머니까지 전화를 주셨는데, 그때 어머니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달영이가 학교서나 어디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정장 입고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전부 반팔 티나 청바지, 면바지를 입었어. 그 애 평소 스타일이 그렇다는 걸 엄마는 확실히 알겠더라."

 

어머니 말씀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젊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을 일러주시는 어머니께 다시 한 번 존경심이 일었다. 동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내 입장에 치우쳤다는 걸 반성하게 됐다. 사실 내가 동생들에게 뭐라 한 것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다. 동생들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 다만 원칙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경우를 무시하거나 결략하는 행동들이 서운했다. 특히 달영이는 나이가 비슷하여 집안의 대소지사를 논할 위치임에도 미진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렇다고 내 성격에 돈을 내놓으라는 게 아니다. 가령 고향집에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대처하거나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하는데 그런 점이 부족하다는 거다. 밀어부치는 추진력이 딸린다.

 

형제간의 우애도 강조하고 싶다. 나는 형으로서 둘째아우 재신이가 일산병원에서 대수술을 받고 소생한 걸 기적으로 믿고 있다. 처음 집에서 발견된 아우는 시체나 다름 없었다. 제 한 몸 일으키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등산용 알루미늄 지팡이로 TV 버튼을 눌러 켜고 끄는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겨우 목숨을 지탱하는 꼴이었다. 즉시 아우를 병원으로 옮겨 대수술을 받도록 했는데 모든 형제가 다녀가는 상황에서 딱 한 명 달영이만이 빠졌다. 그때 많이 서운했다. 그렇다고 그걸 누구한테 얘기한 적은 없다. 혼자만의 생각일뿐. 일종의 철학이지만 어린 동생들 앞에서 나이 많은 동생을 비판하거나 폄훼하지 않는다. 범인(凡人)의 처사가 아니기 때문에...

 

재신이를 퇴원시켜 고향집으로 요양을 보낸 후 아우가 살던 집을 청소하러 갔다가 전염병에 걸리는 줄 알았다. 베란다 가득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들... 각종 폐기물부터 음식물 쓰레기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썩어가고 있었다.  바닥까지 쓸어내고 물청소를 하고 나니 한나절이 흘렀다. 애초 방안 앉은뱅이 책상 유산균 그릇에서도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상황이었다.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재신이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왔다.

 

어머니는 재신이가 회생한 걸 두고 아버지께서 재신이를 살려주셨다 하신다. 재신이가 아프다 할 때 내게 전화를 걸어 속히 병원에 데려가 진단 받도록 가장 많이 강조하신 분이 아버지시다. 어머니는 기억하시는 것이다.

 

어느 집 구석을 볼 것 같으면 부모 중 한쪽이 작고하면 남은 어른더러 '경로당에 다니면서 슬슬 친구나 사귀세요'하는 경우를 본다. 나는 그런 집 구석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령 홀로 남은 아버지더러

"괜찮은 할머니 있으면 데이트하면서 사세요"

하거나,

홀로 된 어머니더러

"멋진 할아버지 있으면 친구 삼아 바람도 쐬고 그러세요."

하는 자손들이 있는데 이는 뭔가 잘못된 사고에서 비롯되는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혼자 남은 분께 먼저 가신 분을 기리며 평생 경건한 마음으로 사실 것을 권하지 못하는가? 따라서 나름 가치관이 있는 나로선 누가 어머니께 인용문과 같은 농담을 한다면 몹시 기분이 상할 것이다. 진짜로 유사한 사례가 있다면 전화를 걸거나 직접 찾아가 '점잖은 분 여생에 먹칠하려 들지 마시오'할 것이다. 아울러 훗날 아내가 죽고 홀로 남는다 해도 다른 여자를 집안에 들이거나 숨어 만나는 딴짓거리는 하지 않겠다. 사람은 품위있게 살다 죽을 필요가 있다.

 

오늘 다시 고향에 갈 것이다. 어머니를 모셔올 작정이다. 이미 4. 23. 10:00 연수동 힘찬병원에 진료예약을 해놨다. 힘찬병원은 노인성 질환과 관절 계통 전문병원이다. 몇 년 전부터 지속된 허리와 무릎 부위의 통증에 대한 정밀검사를 거쳐 치료까지 해드리고 싶다. 말끔히 완쾌되어 오래도록 장수하셨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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