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추억, 랑승만 선생님

펜과잉크 2009. 5. 2. 09:48

 

 

 

 

 

 

김석렬 시인이 랑승만 선생님 근황을 궁금해 하는 글을 올려 선생님에 대한 궁금증이 불쑥 커진다. 그래 아까부터 잡념을 접고 선생님 생각을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어제 신동아아파트 단지를 걸어가는 랑정 시인을 보았다. 저만치서 말이다. 그도 어쩔 수 없이 흰머리를 폭싹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때는 랑승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뵈었다. 어리광도 부리고, 선생님 농담도 받아 드리면서 있다가 오는 게 좋았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걸음을 끊은 이유가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와 연세가 같다는 사실을 안 후부터였다. 그토록 편하던 선생님이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여기서 신변잡기 좀 늘어놓아야겠다. 난 일찍부터 하모니카, 기타, 색소폰 같은 것들과 어울려 놀았다. 실력은 ‘깡통’이지만 직장에선 감 대신 곶감 격으로 평가받을 때도 있다. 그런 까닭으로 직장의 여러 행사에 출연했다. 인천청 대강당 공연 땐 경찰관들로 구성된 그룹 ‘폴리스라인’과 합주했다. 당시 Bb 색소폰을 맡았다. 그즈음 인천 시내 색소폰 마니아 모임을 맡으면서 월미도 야외무대, 자유공원 야외무대, 인천대공원 야외무대, 연안부두 친수공원 야외무대, 문학경기장 야외무대, 시청 앞 미래광장, 옛날 시민회관 터, 송도 신도시 공원 등지에서 연주회도 열었다. 인천시청 미래광장 연주회는 20회도 넘는 것 같다. 다만 실력이 미치지 못할 뿐….

 

이런저런 행적이 알려지면서 직장 행사엔 거의 호출됐다. 행사 주관 부서는 주로 경무과로 여기서 잠깐 경무과를 소개하면 일반 기업의 총무과 내지 인사과로 비유되는데, 각종 회의, 행사 및 의전에 관한 사항과 직원 근태와 복무에 관한 사항 및 후생복지, 인사 업무를 총괄한다. 행사 때마다 모든 섭외는 경무계장이 하는바, 그런 이유로 경무계장과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매번 겸손한 어조로 정중히 부탁하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어느 행사에선 인천문협 이숙, 신미자, 고형옥 선생님을 초빙하여 『Home sweet home』을 감상한 적도 있다. 아직도 직원들은 그 일을 얘기하곤 한다. 할머니 셋이 무대에 나와 『Home sweet home』을 열창할 때 강당의 모든 이는 숨을 죽였다. 절묘한 화음…. 떠나갈듯 한 박수소리…. 김영승 시인을 초빙하여 특별 강의를 의뢰한 적도 있다. 그럴 경우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

예를 들면 아는 직원에게 전화 걸어

“제물포고 출신 맞죠? 오늘 외래강사가 제물포고 출신으로 인천에서 알아주는 시인입니다. 인천뿐인가요? 훌륭하신 분이세요. 학교 선배님이 우리서(薯)에 오시는데 후배들께서 영접 좀 하시지요. 정문에서 강당까지 에스코트해드리는 것도 예의입니다.”

그럼 금방 팀이 급조되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결코 쉽게 흘려버릴 수 없는 부분이다.

 

2007년도인가? 경찰서가 현재의 학익동으로 이전했다. 당시 서장이 경무계통 출신으로 신청사 환경, 그러니까 시설물 배치에 역량을 쏟아 부었다. 그분은 기존 지휘관들과는 달리 신청사를 좀 더 열린 환경으로 꾸미자는 취지를 내걸었다. 이때에도 차출되었다. 서장은 본관 1층 현관부터 4층 복도까지 대형 그림과 서예 작품을 걸고 별관에도 그림과 서예 표구로 장식하도록 지시했다. 그때 뇌리를 스치고 간 게 바로 랑승만 선생님 댁 그림들이었다. 선생님 댁 그림을 한 점이라도 팔아드리면 생계에 도움이 될 거라 믿었고, 그런 발상에 미치니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즉각 경무계장에게 뜻을 비췄고 경무계장도 쾌히 수락했다. 생각대로 일이 착착 진행됐다. 둘이 공사 중인 신청사를 몇 번이나 오가며 작품 배치에 관한 부푼 설계를 끝냈다.

 

어느 날, 경무계장이 참모회의 안건으로 한 작가의 작품에만 편중되지 않도록 형평을 갖추라는 지시가 있었다며 또 다른 분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인천문협 회원인 내가 누굴 생각하겠는가? 김학균 선생님이었다. 김학균 선생님은 동구청 건너편에 ‘崇山’이란 화실을 열고 매일 거기서 지내셨다. 그래 점심시간에 경무계장과 함께 ‘숭산화실’을 찾았다. 그 자리서 서예가 봉강 선생님 얘기가 나왔던 것 같다. 알다시피 김학균 선생님은 그림에도 탁월한 능력을 갖춰 각종 미전에서 여러 번 입상했다. 그림과 서예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지만 두 분이 전각(篆刻) 부문에 뜻을 둔 이상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있으리라 추정된다.

 며칠 후, 경무계장 입에서 봉강 최규천 선생님 얘기가 나왔다. 그 분이 알아서 작품을 선별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는 애초에 생각해둔 게 있어 랑승만 선생님 댁 그림을 보러가자 했다. 그래 둘이 학익동 학익고등학교 옆 빌라 반지하방을 찾아 갔던 것이다.

 

선생님 댁 환경은 궁핍의 나락이었다. 문을 열면서 후각을 어지럽히는 홀아비 냄새에 경무계장 미간이 흐려졌다. 나로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로선 매우 낯설었으리라. 반듯했던 평소 인상과는 달라 보였다. 그림 보존 상태도 안 좋았다. 오랜 세월 다습한 환경에 놓인 탓인지 곰팡이 핀 표구도 눈에 띄었다. 하더라도 열심히 경무계장을 감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랑승만 선생님은 예의 무뚝뚝한 표정이셨지만 그림 한 점 팔아줬으면 하는 애틋한 표정만은 감추시지 않았다.

 

신관 건물 게시 작품 중 랑승만 선생님댁 작품이 포함되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경무계장이 기안하여 통과시킨 결재엔 봉강 최규천 선생님이 일괄 선별해주기로 했다는 내용뿐이었다. 랑승만 선생님 댁 작품에 관한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내 제안이 수렴되지 않았다는 박탈감보다 지금까지의 열정이 수포로 돌아간 데에 따른 좌절감이 훨씬 컸다. 소외감, 배신감. 그림 한 점 팔아줄까 고대(?)하고 계실 선생님 생각을 하니 가슴 에이는 심정이었다. 죄책감마저 일었다.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종결지은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이 증폭되었다. 급기야 반감으로 작용했다. 그 후 경무계장의 어떤 부탁에도 응하지 않았다. 행사에 나가 악기를 연주하는 짓 따위가 무의미했다, 필요할 때만 이용당하는 거 같아서.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이 경멸스러웠다.

‘좆같구먼.’

일종의 증오심이었다.

 

경찰서에 게시된 모든 그림과 서예작품은 봉강 최규천 선생님의 ‘작품’으로만 수놓아졌다. 요즘도 가끔 현관에 들어서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음, 현관에서 제일 먼저 마주보이는 정면에 봉강의 대형 서예작품이 걸리고, 저쪽엔 그분의 1등 제자 작품이 걸리고, 2층엔 그 분의 2등 제자 작품이 걸리고, 3층엔 3등 제자 작품이 걸리고…. 설마 그렇진 않겠지? 그랬을까? 저 많은 작품 중 숭산 선생 그림은 어디 있을까? 일일이 확인하기 싫지만 분명 어딘가 꼽사리 껴서 있을거야. 그림 거는 데에도 lobby가 필요할까? 그런 거 없겠지? 덕망이 높은 분들이니께로…. 히히히.’

 

훗날, 봉강 선생님과 마주앉아 식사할 기회가 있어 인사드리니 우리 직원 중 구양순체(體)를 잘 쓰는 사람이 제자라 하시는 것이다. 나도 안다. 우리서 OO과장도 제자라 하셨다. 그건 몰랐다. 개인적으로는 워낙 선입견이 강해서 자리가 편치 않았다.

 

글이 장황해졌지만 어디까지나 랑승만 선생님 얘길 하려는 의도였다. 랑승만 선생님을 떠올리니 과거사들이 결부되어 마음이 편치 않다. 문득 어제 신동아아파트 단지를 묵묵히 걸어가던 장남 랑정 시인 뒷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그는 분명 어디서부터 걸어왔을 것이고 거기서도 한참을 걸어 집으로 갔을 것이다. 나라면 과연 주안역에서 혹은 시민회관, 아니 신기촌서부터 학익고등학교 근처까지 걸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호주머니에 버스비마저 지불할 여력이 없다면 학익동이 아니라 연수동까지 걸어야 할지도…. 그래야겠지. 먼 옛날, 신촌에서 신발과 돈을 잃어버리고 종각 고옥촌까지 맨발로 걸었을 때처럼.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작품전에 내가 보이지 않았다고. 막연히 안가는 걸 원망 말고 왜 안 가는지 생각해보라. 안 가는 마음도 쓰리고 아프단다. 조금 더 베풀고 살면 안 되는지 묻고 싶다. 당신의 귀때기에 붙은 반쪽짜리 장신구도 한 가정 양식의 밑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석꾼에겐 만 가지 근심이 따라붙는다는데…. 좀 떼어주고 나누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소리를 끝으로 랑승만 선생님의 옥체 존안을 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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