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滿胃

펜과잉크 2009. 5. 18. 22:37

 

 

 

밤 열시가 넘었다. 집엔 아무도 없다. 아, 내가 있군. 식구들을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끼니를 때웠다. 닭고기 육계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어 끓여 밥을 말았다. 토마토, 오이 반토막, 그리고 빵 조금…. 순도(!)가 높은 술 두 잔으로 마감하니 부러울 게 없구나. 아까 EBS-TV에서 삼십대 안팎의 여자 영화감독이 그루지아 프로프스 산맥을 답사하는 걸 시청했는데 거기서 그녀가 '마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서든 행복을 느낀다면 그림 속의 평화가 따로 없을 것이다.

 

큰딸은 외국에 나간 것 같고, 둘째딸은 친구 학교에 놀러갔다가 집으로 오는 중이란다. 큰아들은 예비군 훈련 받고 막걸리 한 잔 하는가 보다. 대망의 인천고 3학년 막내 녀석은 제 엄마랑 연수동 힘찬병원 근처에 있단다. 할머니 문안 마치고 외가 식구들이랑 식사중이다.

 

요즘도 일기를 쓰시는 어머니는 무릎 관절염 외에도 뇌경색 증세로 예전과는 현저히 다르시다.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는가 하면 며느리에게 맡긴 손가방을 잃어버렸다고 하신다. 자주 있는 현상은 아니지만 보는 마음이 쓸쓸하다. 우리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하느님보다도 위대하신 분이었다.

 

장날, 나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동구 밖 고개에서 석양 그늘이 질 때까지 어머니를 기다렸다. 가끔은 어머니가 영영 안 오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닥치곤 했다. 하늘만 빤한, 농사 짓는 집으로 시집 오셔서 고생만 하시는 어머니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산을 돌아오시는 어머니가 보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나보다 동생들이 먼저 어머니를 향해 줄달음 쳤다. 아아, 어둠이 불쑥 우리를 감싸도 집으로 향하는 동안 내내 웃음꽃이 피었다. 

 

어머니, 제가 술을 마셨어요.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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