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군내 소종중 땅이다. 대종중 땅은 논하지 않는다. 따라서 청양군 대치면 오룡리 일대 땅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쪽에도 여러 필지가 있어 유념할 필요가 있다는 점만 사족으로 남긴다. 청양댐을 가로질러 오룡리로 좌회전하여 1.5킬로미터 들어간 지점 오른쪽 산기슭의 민가 두 채도 대종중 땅이다. 일대가 한 필지로 되어 있다. 이것은 언제 마음이 내킬 때 따로 언급할 것이다.
소중중 땅은 칠갑산 공원 지역으로 경치가 수려하다. 도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근간에 이르러 도로를 넓히는 과정에서 직선화를 꾀하다 보니 몇 군데 공사가 이루어질 뿐이다. 근처에 온천이 들어서 한창 개발 중인 곳도 있다.
아래 메모는 2007. 1. 1일자 적은 것이다. 정확한 지명은 공개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여 가려서 찍었다. 참고로, 내 할아버지(柳 成 자, 秀자)와 청남 할아버지(柳 孝 자, 秀 자)는 사촌지간이다. 그러니까 증조할아버지끼리 형제인 것이다. 고조할아버지대에서 갈려졌다. 따라서 아래 필지는 고조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땅이다.
참고로, 윗대 집안은 서울에서 높은 벼슬을 하여 의정부쪽 수락산 기슭에 거대한 묘역이 따로 있다. 그곳엔 조상님들 산소가 왕릉처럼 조성되어 있다. 당대부터 현재까지 후손들이 관리에 신경을 쓴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 집안이 청양으로 내려온 데엔 여러 설이 있으나 다음과 같은 설이 유력하다.
벼술을 하시던 윗대 할아버지께서 승(僧)과 마찰이 생겨 신체적 가혹행위를 한 것이 문제되어 불교 종단의 원성이 높자 당시만 해도 중부 내륙의 오지로 꼽히는 청양 오룡리 고을로 징벌차 내려가게 되었다. 정적(政敵)은 전남 강진이나 신안쪽으로 내려보내 영구히 추방한 반면 할아버지는 중부 내륙이라는 다소 완만한 처벌을 받으신 걸로 안다. 오룡리로 내려오신 할아버지는 현지에서 터를 잡고 대를 이으셨다. 한때는 오룡리 고을이 전부 집안 땅이라고 들었다. 어쨌든 당시만 해도 첩첩산골 산간 오지였던 대치면 일대가 오늘날 많은 발전을 했다.
원본
훗날,
아버지 계신 묘역 주변에 황토집 같은 걸 짓고 조용히 살고픈 마음도 인다. 고향이 있긴 하나 최근 들어 왠지 애정이 식어간다. 산세가 온통 밤나무 단지여서 녹음기에만 그늘이 무성할 뿐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마을이다. 뭐 특별히 경치가 좋다거나 마음에 둘만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황토집에 난로를 놓고 장작불을 지피며 사는 삶을 그려본다. 진정 행복한 삶이다. 사람과는 가까워도 멀어서도 안되니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픈 마음이다. 책도 양식이 될 만한 것만 몇 권... 서적이 많다고 전부가 아니다! 쓰레기 만도 못한 책도 수두룩한 세상이니 말이다.
원본(퍼옴)
집은 웅장하기만 하다고 좋을 게 없다. 내 몸 하나 편히 뉘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물론 손님들이 올 때를 대비해야 하므로 여숙이 가능한 공간도 필요하리라. 하지만 결코 번지르하게 짓지 않을 것이다. '개량된 황토집' 같은 분위기이면 충분하다. 그보다 못하면 또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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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을 가득 패어 쌓아놓으면 세상 걱정할 게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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