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약 심부름

펜과잉크 2009. 7. 20. 14:31

 

 

 

 

고향집으로 전화를 드리니 어머니께서 반갑게 받으십니다. 진지 잡수셨어요? 약도 복용하셨어요? 비는 안 오는지요? 직불금 신청은 잘 하셨나요? 몇 가지를 묻고 무릎 수술 부위에 대해서도 여쭈었습니다. 어머니는 막내가 또 다녀갔다 하셨습니다. 문득 막내아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더군요. 장남인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막내아우가 태어나던 해, 저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습니다. 읍내에서 하숙을 하던 전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열일곱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었습니다.

‘부끄럽지도 않나? 그 연세에 또 애를 낳다니’

저는 최초 소식을 전해준 고향 친구 교실을 찾아가 친구를 불러내 단단히 입조심을 시켰습니다.

“규일아, 우리 부모님이 애 낳았다는 말을 누구한테도 하지 마라. 이 비밀을 안 지키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너 죽고 나 산다.”

그랬습니다. 학교에서 저희 마을까진 30리가 넘는 거리였습니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저와 친구 둘 뿐이었죠. 친구만 입조심하면 제 주변 누구도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저의 가장 큰 걱정은 절 알고 있는 여학생들이 알까봐 조심스러웠습니다.

‘얼라리~, 종호는 또 동생 생겼대요.’

모두 놀릴 것 같았습니다. 특히 대전에서 하숙하는 여자 친구가 알면 큰일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막내아우 존재를 철저히 숨겼던 저는 한 번 거짓말이 영원한 거짓말로 굳어 지금도 형제 수를 묻는 질문엔 얼버무리곤 합니다.

“형제분이 넷이세요?”

“예.”

혹은

“다섯이세요?”

“예”

하면서 적당히 넘어가죠.

형제수를 묻고는 ‘형제들이 많네요’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느 분은 자신의 형제가 더 많으면서 저더러 많다고 하는 분도 있더군요. 늘리고 줄일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

 

마을 친구로부터 소식을 듣고 두 달 가까이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용돈이 떨어져 궁핍의 나락에 처했어도 집에 가기 싫었어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나중엔 아우를 보냈더군요. 제 바로 아래 중학생 아우가 하숙집까지 찾아왔습니다.

“아부지가 형 데리꼬 오랴.”

할 수 없이 아우를 자전거 짐받이에 태우고 고향집으로 갔습니다. 고향집에 도착해서도 안방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왠지 싫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물었지요.

“엄마는 애를 언제까지 낳을 건데? 우리 나이에 동생 보는 애들이 있는 줄 알아?”

막 따졌습니다.

어머니는 웃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어요.

“엄마가 6년간 보건소 지시에 따라 가족계획을 하면서 건강이 안 좋아졌단다. 그래 가족계획을 포기하게 됐어.”

알듯 말듯 한 말씀을 하시며 어머니는 동생이 아주 잘 생겼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안방으로 갔고 거기 아랫목에 누워 있는 막내 동생을 봤죠. 의외였습니다. 백 일도 안 된 녀석이 참 예쁘더군요.

 

하지만 어쨌든 제 나이에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대전의 여자 친구에게도 그 얘기만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녀는 제 막내아우 존재를 모를 것입니다. 남자의 세계에서 한 번 비밀은 영원한 비밀이 되기도 하죠.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막내아우가 말귀를 알아듣게 되자 마을 어른들이 훗날 동네 약 심부름을 하라는 농담을 자주 하셨답니다. 우리 마을, 저희 집이 있는 고을 여덟 집 중 아우보다 어린 자식을 둔 가정이 없었거든요.

“상권아, 훗날 네가 마을 어른들 약 심부름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컸다고 들었습니다. 막내아우가 클 때 저는 객지로 나와 막내아우와 한 공간에서 생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탓으로 아우는 큰형인 저를 매우 어려워합니다. 무슨 말을 하면 ‘예, 형님!’하며 깎듯 하죠.

 

세월이 흘러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는 아들을 꼽으라면 단연 막내아우입니다. 전화만 걸어 말로만 건강 어쩌고 묻는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나아요. 사실 우리 집 며느리들 안부 전화는 격식과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선입감을 크게 받았습니다. 제 아내도 마찬가지이구요. 며느리들이 아무리 시어머니께 잘한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착오일 뿐 통화하는 어투나 억양부터 왠지 진실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피동적인 색채가 짙어요. 하지만 막내아우는 다릅니다. 말도 그렇지만 행동하는 것을 봐도 진실로 어머니를 위한다는 감명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막내아우가 스무 살쯤 되었을 때 가을 추수를 걱정하시는 부모님 말씀을 듣고 트럭을 빌려 친구들을 태우고 고향집으로 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온 적도 있습니다. 어머니 말씀을 빌리면 새벽에 잠을 자다가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막내가 집채 만 한 트럭을 몰고 왔더랍니다. 차에서 다섯 놈이 내리더래요. 당시 아우가 무면허였던 걸로 압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부모님 농사일을 도운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희 형제 중 유일하게 경찰서에 드나든 전력도 몇 번 있습니다. 중학생 때 대천해수욕장 가서 자전거 훔쳐 타고 성주산을 넘다가 붙잡힌 거 외엔 주로 싸움질로 대가를 치렀죠. 오토바이 안전모 안 썼다고 검문하는 경찰관이랑 붙어 끌려간 적도 있습니다. 매번 아버지가 꺼내주셨습니다. 몇 번 전력이 있지만 훗날 부모님께 진정 효도하는 아들 역시 막내아우였습니다.

 

한번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가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로 가는 십리 길을 걷노라니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논으로 가시는 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게 위에 막내아우가 올라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아우에게 연신 말을 시키셨고 아우는 좋아서 깔깔 웃곤 했죠. 아버지 지게에 앉은 막내아우가 그렇게도 행복해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던 아우가 어언 서른둘이 되었네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 고향집 어머니를 가장 극진히 모시는 쪽은 막내아우입니다. 아우의 몸가짐엔 덧씌움이나 형식 같은 게 묻어있지 않아요. 가슴 깊이 우러나오는 진심이 그대로 보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아우를 보시며 흐뭇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어머니 약 심부름을 성실히 수행하는 아들을 대견한 눈으로 바라보실 거예요.

 

 

 

 

* 아래 그림은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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