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Pen 혹은 文學

한상렬 선생님 편지

펜과잉크 2009. 6. 16. 10:51

 

 

 

  

며칠 사무실을 비운 사이 개인 케비닛에 우편물이 있어 보니 한상렬 선생님이 보내주신 책이었습니다.

'출판기념회 때 받은 책인데?'

하며 펼치려니 안에 편지 한 통이 들어있습니다.

선생님의 <제물포수필문학회>와는 오래 전에 함께 했던 인연이 있지요. 당시 회원이셨던 최임순 선생님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셨고, 근년엔 한석수 선생님이 공무원 문예대전 수필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시기도 했습니다. 김선자, 이부자, 박희선, 안미영, 조미자, 박혜숙 선생님...

 

1996년 1월 6일!

지금은 없어진 전주 코아호텔에서 한국수필가협회 주관 송년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인천에서 저와 여류 세 분이 내려간 기억이 납니다. 기차가 김제벌판을 지날 무렵 차창 밖으로 무수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명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처럼 열차는 암울한 김제평야를 가로질러 끝없이 달렸습니다. 눈발이 횡(橫)으로 날리는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저는 거기서 정태춘의 노래에 나오는 '김제벌 까마귀'떼의 거대한 군무를 처음 보았습니다.

 

전주에 도착했을 땐 시내가 온통 눈밭이었습니다. 발목까지 푹푹 빠졌어요. 코아호텔 행사가 끝난 후 거반 차량에 분승하고 죽림온천으로 향했습니다. 눈길을 한 시간 넘게 기어 도착한 온천의 야경은 그림이 따로 없었습니다. 거기 '송산모텔'에 여정을 풀고 주점에 들어가 여흥의 시간을 가졌는데요, 당시 서른여섯의 몸으로 마이크를 잡고 무대로 뛰어 올라가 온 몸을 흔들며 노래했던 기억이 납니다. 술에 취하니 용기가 백배로 솟더군요. 새파란 놈이 수필가협회 회원이라는 것 자체가 점잖은 폼을 즐기려는 '수필가 선생님'들에겐 신기해보였을 것입니다.

 

한겨울 밤이었지만 모텔 인근 슈퍼마켓 테이블에서 새벽까지 정주환 선생님 말씀을 듣던 일, 아침에 온천으로 걸어가다가 인천 회원들과 상봉(?)했던 일 등이 어제처럼 선연합니다. 인천으로 와서도 한동안 관계는 계속됐지요. 맹명희 선생님과 원주 장돈식 선생님 댁에 가서 하루 묵었다 온 날도 있습니다. 맹명희 선생님과 단둘이 간 건 아니고요, 선생님 바깥사장님과 제 막내아들 넷이 갔습니다. 장돈식 선생님 별장에 짐을 풀고 치악산 기슭을 누비면서 산나물을 뜯었지요.

 

저는 시인이 수필을 쓸 수도 있고 수필가도 시와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경계를 긋고 싶지 않아요. 사실 제일 좋아하는 장르가 소설입니다. 지금도 여건만 된다면 시나 수필보다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문인 중 소설가들을 제일 흠모하고 존경합니다.

 

제가 수필가 선생님들과 지속적인 관계로 돈독해지지 못하는 이유로 저만의 문체가 그 분들의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시인이든 소설가든 수필가든 개인의 문체가 있기 마련인데 그걸 그쪽에서 용납하지 않으려는 거죠.

"자네 글은 말이야. 잘 나가다가 납득할 수 없는 문체로 냅다 풍파를 일으키곤 해서 탈이네.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그런가? 정서가 불안정한 탓인가? 좀 더 아름다운 문체를 구사할 수 없는가?"

통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게 그 사람의 문학세계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아요. 수필은 시 혹은 소설과는 달리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인생을 반추할 수 있는 경륜과 역량을 갖춘 자만이 쑬 수 있는 성역쯤으로 믿고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잘 쓰고 못 쓰고의 차이일 뿐, 누구든 산문과 운문을 쓸 수 있다고 봅니다.    

 

언젠가 어느 글에서 한상렬 선생님을 '인천 수필문단의 거성(巨星)'이라 한 적이 있는데요, 인천을 떠나 국내에서도 몇 안 되는 분이십니다. 한결같아요. 옛날엔 윤재천 교수님 수필 이론서를 읽었는데 한상렬 선생님 창작론도 여러 권인 줄 압니다. 도창회 선생님이 인천대에 계셨던가요? 연세가 상당하실 줄 압니다만... 서정범 선생님도 계셨구요. 사모님과 부부싸움이 잦으셨다는... 박동규, 윤모촌... 인천의 변해명 선생님 젊었을 적 작품도 여러 편 떠오릅니다. 베이컨, 에머슨, 찰스 램... 양주동, 윤오영, 이양하, 이희승, 안병욱...

 

캔맥주가 바닥 났네요. 이제 그만 접고 잘까 합니다. 건강도 건강할 때 챙기라고, 무리하다간 탈나기 십상입니다. 한상렬 선생님의 지체 존안과 댁내 평안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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