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벚나무 숲을 지나다가 도로에 떨어져 으깨진 버찌 열매들을 보았습니다. 순간 버찌즙으로 글을 쓰면 어떨까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급기야 손을 뻗어 버찌를 따기 시작했어요. 종이컵 분량을 모아 집으로 와서 본격적인 작업에 임했습니다.
종이컵 분량의 버찌
비닐 장갑을 끼고 버찌를 으깨는 과정입니다. 고르게 으깨어 즙이 충분히 추출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막내아들을 불러 전 과정을 카메라로 찍도록 시켰습니다. 어려서부터 여행을 자주 다녀 자연스레 제 정서에 길들여져 있지요. 부전자전이죠, 뭐...
버찌를 으깨는 과정
으깨어 작업한 버찌를 다른 종이컵에 여과하는 과정입니다. 거름종이가 없어 아내의 못쓰는 스타킹을 슬쩍해서 -아내는 잠들었습니다- 종이컵 위에 씌우고 버찌즙을 따랐습니다.
거름종이 대용의 스타킹에 즙 거르기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타킹 구조가 의외로 치밀하더군요. 즙이 스타킹 망사를 통과하질 못하는 겁니다. 문제에 봉착하니 사람이 신중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표정도 그렇지요? 스타킹을 강제로 늘려 모공을 넓히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여과시키기
부자지간에 머리를 맞대고 뭔가에 심오해있는 게 궁금한지 애견 '꿈돌이'가 다가와 기웃댑니다. 푸들이란 종이 원래 호기심이 많나 봅니다. 아울러 감정 기복이 심해 기분 좋을 땐 주인 앞에서 빙빙 돌고 뛰는 등 재주를 부리다가 뭐라 나무라면 눈을 내리깔고 엉거주춤 멀어져 슬슬 눈치를 보곤 합니다. 녀석이 아들의 카메라 앞에서 얼씬거리다가 결국 한 방 찍혔네요. 귀엽고 영악한 놈...
꿈돌이
본론으로 들어가 즙을 걸러내는 과정은 다른 방법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내용물을 스타킹에 넣고 손으로 쥐어 짜 걸러내는 거지요. 그게 훨씬 쉽겠더라구요. 과연 생각대로 잘 되었습니다. 과정이 순탄하지 못해 작업 현장이 지저분한 면은 있습니다만...
강력한 힘으로 쥐어짜기
마지막 단계
완성품
이제 시험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몇 자 끄적거려보니 색감이 짙어 잉크 못지 않은 선명도였습니다. 오, 정말 멋진 잉크가 나왔습니다. 맥주 한 잔을 갖다놓고 본격적인 쓰기에 돌입합니다.
맥주와 잉크
버찌 물감으로 글쓰기 : 클릭시 원본으로 커짐
버찌 물감으로 그리기 - 구도가 영...
작년엔 달개비꽃물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버찌즙이 달개비꽃 즙보다 농도가 짙더군요. 달개비꽃물이 로얄블루(혹은 플로리아블루)에 가깝다면 버찌물감은 블루블랙입니다.
시인 백석은 사랑하는 연인 최정희에게 달개비꽃물로 편지를 썼다 합니다. 펜으로 물감을 콕콕 찍어 쓴 거지요. 잉크도 없이 사는 궁색한 형편이었나 봐요. 마침 잉크가 떨어졌을 수도... 사랑하는 연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인 백석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끝내 둘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적어도 편지를 쓰는 순간만은 시인의 영혼이 황홀경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버찌 물감으로 다시 그린 오크밸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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