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전화 콤플렉스

펜과잉크 2009. 7. 30. 22:16

 

 

 

며칠 전,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으니 여자 목소리가 '나야'하는 것이었다. 나는 누구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아 '누구?'하고 물었고, 재차 그 쪽에서 '나야' 대답했다.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 같은데 영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누군데?'했더니 '종호씨, 나 몰라?'하는 게 아닌가? 나는 약간 비뚤어진 심사로 '나가 누군데?'하고 따지듯이 물었고, 역시 이번에도 그쪽의 대답이 이어졌다.

"정말 모른단 말야?"

대답 대신 3-4초 침묵을 끌던 난 순간 열화통이 터져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세상에, 내가 아는 여자가 한 둘인가? 100명, 200명... 3천 궁녀를 헤아리는 판에 전화를 걸어 그런 식으로 묻는다면 대뜸 어떻게 아냐 말이다. 싸가지 없는 매너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비슷한 목소리라 믿고 '순이냐?'하고 묻는다면 그쪽에서 다음과 같이 따질 것이다.

"종호씨는 여자가 하도 많아 내 목소리도 기억 못하는군."

기분 나쁜 것들이다. 결국 한 시간 정도 지나 전화가 다시 왔고, 그녀는 내 고향 친구 하숙이였다. 몇 년 만에 전화를 걸어 '나야' 하면 내가 너를 아냐? 싸가지야, 다음부턴 예의 좀 갖춰라.  

 

오늘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면서 안경을 벗었더니 그 틈에 휴대폰이 울린다. 아주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을 받자 '나야'하는 것이다. 순간 경계심이 들어 화면을 봤더니 이름을 입력해놓은 번호는 확실한데 안경을 벗어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여보세요?'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나야'한다. 또 나란다. 나는 급속히 신경질적인 톤이 되어 '나가 누군데? 너 누구야?'하고 따졌다. 그랬더니 '얼래? 나야, 엄마야!' 한다. 깜짝 놀라 안경을 갖다 쓰고 보니 진짜 고향집 어머니이시다.

"어? 어머니... 금방 전화 드릴게요."

그랬더니 미장원 여자도 웃고, 놀러온 여자도 웃고, 기다리는 손님도 웃는다. 나 또한 무안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전화 예절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막연히 '나야'라고 해버리면 받는 입장에선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번호를 저장해놓지 않은 이상 누군지 어찌 알겠는가. 잘못 말하면 원망이 따를 것 같아 얼버무리면서 생각하게 되고 얼른 떠오르지 않으니 스스로 기분이 잡쳐버린다. 몇 번의 쓰디 쓴 경험 때문에 괜히 어머니께 실수한 꼴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도 생각하실까?

'이것이 지 에미 목소리마저 헷갈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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