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스크랩] 장석남시인과 시 몇편

펜과잉크 2010. 4. 13. 23:57



장석남 시인 
1965년 경기도 덕적에서 출생, 인천에서 성장하였고, 제물포고와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시단에 등단하였다.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젖은 눈> <물의 정거장><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등이 있음  

 

----------------------------------------게시 목록------------------------------------------

 

맨발로 걷기 / 장석남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목돈 / 장석남
달과 수숫대 / 장석남
저녁의 우울 / 장석남
배를 매며 / 장석남
배호ㆍ 3  / 장석남
군불을 지피며 2 / 장석남
水墨 정원8 / 장석남
소래라는 곳 / 장석남

 

 

 


맨발로 걷기 / 장석남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또다시 나무에 싹이 나고
나는 나무에 오르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1987년 경향신문-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窓엔
살구나무에 놀러 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목돈 / 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살찐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너덜 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젼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일,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가슴 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겹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달과 수숫대 / 장석남
-"貧"

 

 

막 이삭 패기 시작한 수숫대가
낮달을
마당 바깥 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아래쪽이 다 닳아진 달을 주워다 어디다 쓰나
생각한 다음날
조금 더 여물어진 달을
이번엔 洞口 개울물 한쪽에 잇대어
깁고 있었다


그러다가 맑디맑은 一生이 된
빈 수숫대를 본다
단 두 개의 서까래를 올린

속으로 달이
들락날락한다

 

 


저녁의 우울 / 장석남

 

 

여의도 분식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강변을 걸었다
강은 내게 오래된 저녁과 속이 터진 어둠을 보여주며
세상을 내려갔다
천둥오리도 몇 마리 산문처럼 물 위에 떴다
날곤 날곤 했다 그러면 강은 끼루루룩 울엇다
내가 너댓 개의 발걸음으로 강을 걷는 것은
보고 싶은 자가 내가 닿을 수 없는 멀리에 있는
사사로운 까닭이지만, 새가 나는데 강이 우는 것은
울며 갑작스레 내 발치에서 철썩이는 것은 이 저녁을
어찌 하겠다는 뜻일까
 

시집 - 먹이를 하늘에서 구하는 새는 없다 (1992년 들꽃세상)

 

 

 

배를 매며 /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배호ㆍ 3  / 장석남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앞에서 눈을 맞는다
   눈이 오니까 그녀는 지금
   눈길을 오리라
   그녀 뒤의 발자국을 눈은 지우리라
   자꾸 눈발은 등을 민다 그녀는
   등을 밀리며 오리라 리어카 스피커에서
   한생애가 쏟아져나와
   쉽게 살얼음이 되는 것 바라보며
   사람들은 찬 이마와 머리칼을 데리고
   어디로 가나 그녀는 지금
   손아귀에 깊은 골짜기를 쥐고 오리라
   눈길을 오며 그녀는 아이를 가지리라
   재개봉 영화 간판을 올리며 눈발 속의 한 인부가
   흑백 화면처럼 저녁을 가린다
   강화버스 쪽으로 골목 하나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적막한 불빛을 물고
   강화버스가 두런두런 들어선다
   골짜기 내게 다가와 어깨에 묻은 눈을 털고
   말없이 손을 잡고 나는
   그녀에게 入山한다
   눈길을 다시 가며 그녀는 호두나무꽃 같은 아이를 가지리라   

 

 


군불을 지피며 2 / 장석남 

 

 

집 부서진 것들을 주워다 지폈는데
아궁이에서 재를 끄집어내니
한 됫박은 되게 못이 나왔다
어느집 家系였을까


다시 불을 넣는다
마음에서 두꺼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잉걸로 깊어지는 동안
차갑게 일어서는 속의 못끝들


감히 살아온 생애를 다 넣을 수는 없고 나는
뜨거워진 정강이를 가슴으로 쓸어안는다


불이 휜다

 

 


水墨 정원8 / 장석남
-  대숲

 

 

해가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또 파란 달이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대숲은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밤새 수런수런대며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싯푸른 빛으로만 만들어서
먼데 애달픈 이의 새벽꿈으로도 보내는가

 
대숲을 걸어나온 길 하나는
둥실둥실 흰 고름처럼 마을을 흘러 질러간다
 


시집 - 왼족 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비평사)
 

 


소래라는 곳 / 장석남

 

 

저녁이면 어김없이 하늘이 붉은 얼굴로
뭉클하게 옆구리에서 만져지는 거기
바다가 문병객처럼 올라오고
그 물길로 통통배가
텅텅텅텅 텅 빈 채
족보책 같은 모습으로 주둥이를 갖다댄다


잡어떼, 뚫린 그물코, 텅 빈 눈,
갈쿠리손, 거품을 문 게

 
풀꽃들이 박수치는지
해안 초소 위로 별이 떴다
거기에 가면 별이 뜨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
별에 눈맞추며 덜컹대는
수인선 협궤열차에 가슴을 다치지 않으려면
별에 들키지 않아야 한다
가슴에 휑한 협궤의 터널이 나지 않으려면


시집 -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1995년 문학과지성사)

출처 : 인성헌(吝醒軒)
글쓴이 : 먼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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