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시골 출신치곤 양질의 삶을 산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서울서 생활하시느라 어머니랑 논밭으로 다니며 일할 때의 고통스러웠던 기억 외엔 주로 향유하는 쪽의 삶을 살아왔다. 집안이 넉넉했다기보다 부모님의 크신 사랑 덕분이 아닌가 한다.
1974년 3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버지는 오일장터에선 볼 수조차 없는 큼직한 원목 책상을 사오셨다. 그 책상은 나를 거쳐 첫째아우, 둘째아우, 여동생, 셋째아우가 썼다. 훗날 누님이 재가하면서 버리듯 떨치고 간 조카들까지 공부했다. 지금도 고향집 사랑채 웃목에 그대로 있다. 아버지가 사오시던 날 내가 기쁜 마음에 서랍을 빼서 밑면에다 매직으로 날짜를 적어놓았는데 1974년이 맞을 것이다.
'대영' 신사용 자전거를 받은 것도 중학교 1학년 시절이다. '삼천리 자전거'가 대세였지만 솔직히 '삼천리표' 자전거는 신사용보다는 삽 싣고 물꼬 보러 다니기 좋은 오프로드용 스타일이었다. '짐빠'라고 하여 주막이나 쌀집에서 막걸리통 내지 쌀가마 싣고 배달해주는 화물용과는 달랐지만 아무튼 예쁜 신사용 자전거는 '대영'이라는 회사에서 독점하다시피 했다. 신사용 자전거가 봄볕 아래 울타리에 빨래 너는 새악시 스타일이라면 준화물 자전거는 끄떡없이 버티는 중년 과부를, 화물전용 자전거는 투박하고 힘센 이웃집 머슴과도 같다 할 것이다.
신사용 자전거는 영어발음으로 표현하면 '온로드바이크'여서 아스팔트나 한길 주행에 맞는 구조였다. 프레임이 날쌍하여 가벼웠고 핸들의 생김새나 크랙션 모양이 오밀조밀한 게 특징이었다. 짐받이도 책가방 하나 얹으면 딱 좋을 크기였다. 거기에 여학생을 태우고 달릴 때면 지나는 놈들 모두가 다시 쳐다봤다. 뭐 시골 풍경이 그렇고 그랬다. 삼륜차 한 대 지나가도 문 열고 내다보는 환경이었으니 무슨 수식이 필요할까?
신사용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은 나 혼자였다. 자전거가 예뻐서 그런지 내가 지나가면 여학생들도 한 번 더 쳐다보는 것 같았다. 운동장 옆 자전거 주차장에 자물통 걸 때에도 교실 창문으로 내다보는 여학생들이 보였다.
아버지 계실 적만 해도, 그러니까 작년까지만 해도 내 휴가의 80% 가량은 고향집이었다. 고향집 가서 조상님들 산소 찾아 절 드리고 부모님 계신 집에 며칠 있다 오는 게 행복했다. 인터넷 세상이 궁금하면 자정 넘어서도 차를 몰고 면사무소 소재지로 내달았다. 하나뿐인 PC방이었지만 자정이 넘어서도 방앗간 피대처럼 팽팽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어린놈들이 담배 꼬나물고 어른 흉내 내는 꼴이 보기 싫어 그렇지...
고향집 사랑채에 있으면 마음이 참 편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더러 지루하면 기타를 치면서 소중한 시간들을 활용해나갔다. 졸리면 그대로 누워 잠을 청하면 됐다. 어머니가 부르시면 안채로 건너가 풍성한 밥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오늘 어느 분이 보내온 메일에 내 사진 한 컷이 첨부되어 있다. 특별한 설명이 없는 사진은 몇 해 전 고향집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찍은 것이다. 저 때만 해도 아버지가 계셨다. 새벽까지 책을 보거나 잡념에 빠져 있노라면 아버지 기침소리가 들리며 안채 거실의 전축이 노래가락을 뽑았다. 어느날은 아버지 기침소리 들리고 경운기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아버지가 일터로 나가시는 게 아닌가? 새벽부터 논밭을 둘러본 심산이셨던 것이다. 어머니도 다르지 않았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달밤에 텃밭 고랑에 앉아 풀 뽑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한 분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장남을 말없이 사랑해주셨던 아버지... 자식에게조차 말을 낮추지 않았던 생전의 모습이 많이 그립다. 아우들에겐 '해라' '하지 마라' 분명한 어조였지만 장남인 내겐 '해야 해' '하면 안돼'하는 식으로 늘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어디 나가서 어른들 뵈면 싸게 쫓아가 인사부텀 드려야 허는 거여."
그 말씀을 내 나이 사십의 중반까지 들었던 것 같다. 그게 오늘날 내 아들 지석이에게 이어져 아파트 경비원 어른들도 각별히 알아본다. 장남으로 자란 나는 좀 거만한 데가 있다고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 지석이처럼 열 번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받는 태도를 평가하여 성의없이 받는 사람에겐 인사를 거르는 일도 없지 않으니 말이다.
'인사를 싸가지 없이 받네. 에이, 다음부턴 안 해!'
그런 식이다.
지금 고향집엔 어머니 뿐이다. 자식들도 며느리들도 예전만 못하다. 며느리들도 말로만 어쩌니저쩌니 한다. 건질 것 없는 시댁에 휘발유값 없애면서 다니기 싫은 게 며느리들의 실속있는 가계부법칙 아니겠는가. 뭐라고 탓하기 전에 내 정신을 다질 뿐이다. 아내도 뇌의 구조는 나와 확연히 다르다. 시댁과 친정에 대한 관심비율을 2:8로 보면 적당할 것이다. 아내는 처남들 고민의 해결사로서 새벽에도 이불속에서 술 취한 처남과 다정히 통화한다. 처남과 아내의 심야통화엔 꼭 처남댁에 관한 일절이 빠지지 않는바, '그 년은 대개 못된 년'으로 통용되더라. 술 마시고 새벽에 헤롱대는 놈은 멀쩡하냐?
훗날 이 직을 그만 두면 산골로 들어가 조용히 살련다. 청양 읍내 근처에 작은 터전을 마련하고 주로 집에 틀어박혀 사는 삶을 꾀할 것이다. 읍내엔 일주일 혹은 열흘에 한 번 다녀오는 걸로 족하다. 집에서 책을 읽거나 만년필로 끄적이며 지내고 싶다. 장작을 쪼개어 추녀 밑에 쌓고, 기타줄도 갈아끼우고, 앞산 아버지 산소에도 다녀오고, 칠갑산 그늘 밑으로 싸리버섯 따러도 가고, 개 훈련 시키러 뒷산에도 오르고, 세상 하늘 바라보며 한가로이 상념에 잠기는 삶을 나는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