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옛 그리움

펜과잉크 2010. 5. 10. 12:51

 

 

 

80년대 초,
강원도 홍천이나 인제 혹은 양구에 가려면 서울 용산역에 내려 전철을 타고 동마장터미널 가서 금강여객 시외버스를 타야만 했다. 길은 지루하게 지어졌다. 인제까지 4시간 30분 소요됐던 걸로 기억한다. 중간에 팔당 호반길을 지나고 용문을 지나 홍천과 신남... 신남에서 양구로 가는 삼거리 거쳐 인제, 원통... 원통에서 다시 고성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30분 가량을 달려야 부대 앞 마을 정류장이었다. 그땐 모든 게 숨막힐 것 같았고 오직 고향과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 뿐이었다. 첫사랑도 있었으나 소식이 끊긴 상태... 유일하게 주소를 알고 있는 그녀의 친구에게 소식을 묻는 편지를 수없이 보냈으나 달랑 한 통 온 답장은 16절지 백노지에 연필로 쓴 세 줄 뿐이었다.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는 게 네게도 좋을 것 같다'
그런 내용이었다. 군인의 사기도 좀 생각해주지, 연필로 달랑 세 줄을 써 보내다니... 훗날 그녀는 내가 자기를 흠모한다고 소문을 퍼뜨렸고, 아직도 진실은 나만이 아는 걸로 가려져 있다. 나중에 첫사랑과 소식이 닿았을 땐 내 입장도 반, 친구 말도 반쯤 믿는 어중간한 입장으로 변해 있었다. 니미럴... 남녀가 애정관계로 발전했다면 대전역전 수많은 여관이나 여인숙 한 번쯤은 들렀어야 한다. 군인이 휴가 나가 가장 하고 싶은 게 섹스 아닌가? 그 시절의 애정관이라는 게 대부분 그런 쪽이었다.

 

여자 문제가 나와 하나만 더 언급하겠다. 90년대 중반, 수도권 중학교 동창생들 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서울 이문동 혹은 수원에 사는 동창생들이 인천까지 몰려왔고 우리도 서울 이문동이나 기타 지역으로 가서 모임에 참석했다. 노래방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한 때여서 저녁에 만나 식사하고 노래방 가서 늦게까지 노는 건 당연사였다. 그런 식으로 반복되니 남녀간 애정이 싹트는 일도 있어 이양현과 이지용이 동창상 관계를 넘어 결혼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의정부에서 전철로 오는 여동창생이 있었는데 내게 색다른 눈빛을 던지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그녀에게 눈길을 줄 입장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수도권엔 많은 친구와 지인들이 있었다. 솔직히 내 여성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예쁜 쪽보다는 머리에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고 감성이 뛰어나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문학이나 음악에 관해 얘기하면 어느 정도 동격의 대화가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를 잘한 것도 문학이나 예능 계통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중학교 여동창생 중 마음에 있었던 여자가 둘이었는데 이지용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우리집 바로 아랫집이라 마음 뿐이었고, -부모님이 아시면 박살나는 줄 알고 꿈만 꾸었음- 수도권 모임을 열 땐 난 이미 결혼하여 달리 여건이 못되었다. 한 동창생은 위에서 말한 첫사랑이었으나 대전에 살아 연이 닿지 않았다. 대전의 첫사랑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우리집에 일방적으로 편지를 보내 내가 어머니께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기 시작하면서부터...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좋아지니 내 열정이 더 컸다.

 

아무튼 이러한 마당에 한번은 의정부 여동창생과 개인적인 통화가 오갔고, 내가 종로서적에 책을 사러 가면서 종로서적 뒷골목 커피숍에서 차 한 잔 마시고 헤어지는 만남이 있었다. 커피 마시면서 손을 잡은 것도, 커피숍을 나와 식당이나 여관으로 간 것도 아니었다. 거기서 끝났다. 그런데 이 여동창생이 대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대전 동창생들에게 내 얘기가 나올 때마다 '종호가 날 좋아했다'는 둥 '아직도 못잊어 감시하는 식의 전화가 온다'는 둥 날조된 소문을 퍼뜨렸던 모양이다. 첫사랑의 귀에도 들어가 이 부분을 서운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사람이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 그런 소문이 나도느냐는 식이었다. 달리 변명할 게 없었다. 그럴 때마다 준비된 답이 없는 난 얼버무리거나 말을 더듬기 일쑤였다. 그게 오히려 역효과인 것 같다. 자신있게 안면에 철판 깔고 '아니다' 혹은'그렇지 않다'라고 둘러대면 상대가 믿음을 갖을텐데 굳이 그러고 싶지 않으니 맨날 궁지에 몰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대전엔 내 가장 친한 환교가 있다. 그 역시 공직에 있다. 그는 여러 방면에 적극적인 성격이어서 중학교 동창생 모임에도 열성이다. 만사가 열성인 친구다. 가장 많이 통화를 나누는 친구가 그 친구다. 그 친구와 난 가정사의 고민까지도 나눈다. 그 친구 외엔 달리 통화하고픈 동창생들이 없다. 솔직히 그렇다. 뭐 삼십년 넘어 새삼스럽게 동창이라고 통화하고 만나고 난리를 피우는가.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한번은 내가 친구들을 불러 읍내에서 멋지게 한 턱 낸 적이 있다. 요즘 말로 얘기하면 '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근데 무리를 해서 가지고 있던 등록금까지 써 버렸다. 시기적으로 담배 수매가 있을 시기여서 어머니께 달리 3만원을 달라고 말씀드리려 작심하고 있었는데 -그 시절의 3만원이면 지금의 30만원보다 많았음- 담배 수매 일자가 연말로 연기되어 버렸다. 낭패였다. 등록금을 못내면 졸업할 수 없었다. 난 고민하기 시작했다. 등록금을 못 내고 헤매는 학생이 나 혼자였다. 이런 사실을 급우이자 친구였던 두현이가 알고 1반부터 9반까지 모자로 동냥을 하러 다녔는데 그 돈을 가지고 있다가 읍내에서 강도를 만나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이래저래 나락의 지경이었다. 그 사실이 환교의 귀에 들어갔다. 당시 환교는 강경상고에 다녔는데 -강경상고는 일제시대부터 중부권 인재들을 흡수한 전통있는 상업학교- 부여농협에 실습생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월급이 8만원쯤 되었다고 들었다. 아무튼 환교가 가불을 하고, 두현이와 규일이, 중범이와 내가 조금씩 돈을 보태어 등록금을 완납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친구들 중 중범이만 소식이 끊어지고 환교와 두현이, 규일이와는 여전히 친하게 지낸다. 죽마고우와 같은 친구들이니...

 

환교는 내가 특수부대원으로 강원도 깊은 산골에 있을 때 벌을 치는 삼촌을 따라 원통까지 왔다가 내 부대가 근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외버스 타고 면회까지 왔었으나 마침 훈련으로 외부에 나가 있어 만나지 못했다. 지금이야 글 세 줄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지만 원통발 고성행 시외버스를 타러 가는 자체도 일이었으리라. 벌 치는 천막이 있는 곳은 원통 뒷산 너머 개울가쯤 되었던 걸로 안다. 거기서 원통까지 나와 우리 부대 면회를 왔다는 게 고마울 뿐이다. 마을 앞 버스 정류장에서도 한참 걸어야 부대였다. 환교는 벌치는 삼촌의 천막에서 일을 거들면서 현지 마을 처녀와도 사랑에 빠져 짧은 기간 불같은 사랑을 나눈 걸로 안다.

 

내가 첫휴가를 나와 시내버스 기사, 여자 차장, 남자 조수, 실습 조수 넷과 시비가 붙어 그들을 몽땅 때려눕히고 피신했을 때에도 환교가 도와줬다. 그때 환교는 주산부기학원을 운영했는데 자정 넘어 찾아가니 따뜻이 맞이해주는 것이었다. 원장실 쇼파에서 이불 덮고 아주 잘 잤다. 이튿날 버들 뒷산으로 하여 집으로 가니 이미 소 한 마리가 팔려나간 상태였다. 간밤에 지서 직원들이 오가고 이장님이 주선하여 일을 해결한 상태였다. 나는 잘 피신했다 생각했다. 소 한 마리 팔려나간 게 속이 쓰릴 뿐... 아무튼 우린 참으로 절친한 관계다. 공직엔 환교가 나보다 늦게 들어왔다.

 

세월이 흘러 인터넷이 세상을 주름잡고 온 국민이 인터넷 중독이 되어 헤매고 있는 지금 공교롭게도 우리 중학교 동창 까페가 개설되었다. 물론 나도 가입했다. 거기서도 떳떳하다. 내가 사랑했던 여동창생은 오직 첫사랑뿐이고, 다른 여동창생들과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러니 나에 관한 소문이 유포되면 과감히 분쇄해 나갈 것이다. 그 기회는 일부 나를 헛소문의 궁지로 몰고 간 인물들에 대해 응분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내가 누굴 좋아했다고? 미친년들, 지랄하고 자빠졌네.

 

지금 이 나이에 생각하니 그 옛날, 동마장터미널에서 금강여객 시외버스를 타고 가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차방 밖으로 비켜가는 집들... 도시를 벗어나 달리던 강변 길... 다시 산길... 소양호반과 설악의 산세들... 그리하여 요즘은 다시 한 번 그곳을 둘러보고픈 마음에 사로잡힌다. 한때는 내가 군 생활했던 강원도 인제 어디쯤에 터를 잡고 말년을 보낼까도 했지만 고향과 조상님들 산소가 너무 멀다.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갖춤에 부족함이 따를까 염려되어 망설여진다. 다만 여전히 마음으로 그릴뿐이다. 청춘의 시절에 기쁨과 설레임으로 오던 휴가길, 뼈를 파고드는 고통으로 밤길을 가던 천리행군길, 휴가를 마치고 돌아갈 때의 막연함에 한숨이 쌓이던 그 길을 한 번 밟고픈 마음이다. 

 

음력 3월 28일,

내일이 생일이다. 지금 이 시각, 어머니는 부여 성모안과의원에서 백내장 수술중이다. 오후 1시부터 수술이라 했으니... 매년 생일이면 전화 걸어 '아침에 미역국은 먹었니?' 하시던 어머니... 미역국에 밥 말아먹고 들에 나가 일하던 고향의 어린시절이 떠오른다. 담배 모종하고 논두렁 다지던 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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