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구두의 재발견

펜과잉크 2010. 6. 29. 19:27

 

 

얼마 전, 길을 가다가 구제품 가게 간판을 보았다. 예전에도 몇 번 지나치며 보았으나 그날은 왠지 호기심이 일었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눈에 띄는 게 많았다. 특히 시선을 잡아 끄는 게 있었는데 다름 아닌 헌 구두였다. 얼른 봐도 아주 오래된 구두였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매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구두를 보면서 옛날에 신던 구두가 생각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구두 값이 비싸다고 믿는 난 당시로선 거금을 주고 구두를 샀다. 비싼 값을 한다고, 꽤 오래 신었던 기억이 난다. 바느질이 잘된 가죽제화였는데 구두약으로 꾸준히 문질러주자 나름대로 멋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가족들 몰래 신발장의 낡은 것들을 내다버리면서 함께 휩쓸려 사라졌다. 

 

구두를 들어 살펴보니 예사롭지가 않았다. 바느질이 꼼꼼히 처리되고 볼도 살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발에 딱 맞았다. 구두를 사기로 결정했다. 주인에게 가격을 물으니 1만원이란다. 망설임없이 구입하여 곧장 단골 구두방으로 갔다. 구두방 사장님께 내밀자 무척 재미있단다.

"오래된 겁니다. 가죽이 아주 좋네요."

그러더니 '어?'하며 새로운 표정을 짓는다.

"상표가 메이드 인 이테리입니다."

사장님은 상표만 달랑 박아놓은 '짝퉁'과는 다른 진품이라고 했다. 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잘 부탁하겠노라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구두 밑창부터 뜯어냈다. 나는 평소대로 적당한 높이의 걸로 주문했다. 구두 밑창은 지나치게 딱딱해도 피로감이 따른다. 뒷굽이 너무 높아도 보행이 편치 않음은 물론이다. 굽 높은 하이힐 신고 어기적거리며 걷는 여인의 모습은 멋있다는 차원과 정반대다. 하이힐은 보통의 센스가 아니면 적응하기 힘들어 보인다.

 

군인들의 군화에 관해 설명하면, 사람들이 흔히 군화를 둔하고 무거운 걸로만 인식하는데 막상 적응하고 나면 상당히 편하다. 군화 끈을 알맞은 탄력으로 조여주면 눈길이나 빙판에서 발목이 삐는 사고를 막을 수 있다. 행군 하다가 발바닥에 수포가 생기는 예는 군화와 발의 크기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발에 잘 맞는 군화에 장거리 보행의 두꺼운 양말을 신으면 발이 부르트는 현상으로부터 좀 더 안전할 수 있다.

 

구두 수선 작업은 생각보다 오래 진행되었다. 뒷굽 밑창에 접착제를 바르고 못을 박는 등의 절차가 따랐다. 하도 오래된 제품이라 볼 아래 밑창에도 틈이 벌어진 상태였다. 사장님은 그 부분도 마저 떼어내고 접착제로 붙였다. 수선 작업이 끝나고 구두약을 칠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구두약은 아낌없이 발라주는 게 좋다. 가죽제화는 장마철 습기에 약하므로 방수성 보완을 위해 구두약을 반복해 칠해줘야 한다. 사장님은 단골 고객에 대한 최상의 서비스답게 구두약을 푹푹 찍어 덧칠해주신다. 그런 다음 물수건으로 문질렀다. 가죽제화는 약품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 것 같다. 군대시절 수없이 경험해본 결론이다.

 

두 시간 가까이 작업한 구두는 완전한 제품으로 거듭났다. 명품이 따로 있는가? 바로 이런 걸 두고 명품이라 하는 것이다. 나는 악기나 만년필 같은 것을 소중히 다루면서 신품만이 최고란 인식을 버린지 오래다. 악기는 말할 것 없고 만년필도 그렇다. 20-30년 전의 펜촉의 재질이 요즘 것보다 훨씬 낫다. 몽블랑 만년필의 경우 요즘도 장인이 직접 수공으로 깎는다고 하는데 과거의 것들과 대조하면 형편없이 떨어지는 수준이다. 재질 또한 과거 제품들이 훨씬 정교하다. 다만 오래된 만년필은 촉의 편마모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

 

구두 수선비는 뒷굽 교체, 밑창 작업, 깔창 보완, 구두약칠을 합쳐 모두 1만원이었다. 구두 살 때 지불한 것까지 도합 2만원이 들어간 셈이다. 구두를 받아드는 순간 흐뭇한 마음이 일었다. 이게 어디 헌 구두인가. 좋은 재질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훌륭한 명품 구두 아니냐. 내 발에도 딱 맞으니 앞으로 몇 년은 충분히 신게 생겼다. 직장으로부터 연중 두 컬레씩 지급받는 구두에 비하면 이건 정말 횡재한 거다. 사실 며칠 전 친구들 모임에도 이 구두를 신고 갔다. 기분이 참 좋았다. 내 구두만큼 멋진 구두 신은 사람이 없었다. '구두가 바뀌었네?'하는 친구에게 '20년도 넘은 거여' 그렇게만 말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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