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달 이상 쉬던 연습실에 나갔다. 동호회원끼리 매월 회비를 갹출하여 임대료와 기타 잡비를 충당하기 때문에 돈만 내고 나가지 않으면 실로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지난 한 달간 아예 돈을 내지 않고 나가지 않았다. 한 달을 연습하지 않았다 하여 실력이 떨어졌다고 보지 않는다. 한 달간 연습한다고 실력이 크게 향상되지 않는 이치와 같다. 물론 호흡이 딸리는 등의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이틀 가량 연습하여 원래의 테크닉을 되찾을 수 있다. 본문의 얘기가 있으므로 이 정도에서 서두를 접겠다.
연습실엔 주부들이 몇 명 있다. 그녀들은 주로 오후 시간에 나와 연습한다. 악기 연습하러 오는 여자들 옷차림이 18홀짜리 골프장에 나가는 외모다. 주로 그렇다. 뒷덜미 목칼라를 세우고 한 돈쭝쯤 되는 목걸이를 했다. 색소폰이란 악기가 마우스피스에 리드를 장착하여 불게 되어 있는데 입술에 웬 립스틱을 진하게 바르는지... 그래놓고 연습부스에 있는 시간은 3할도 채 안된다. 나머지 시간은 중앙 홀의 원탁에 앉아 잡담으로 일관한다. 거기엔 반드시 사내들이 섞여있다. 그렇지 않으면 얘기가 되지 않으니까... 남녀가 뒤섞여 과일을 깎아 먹거나 음료수를 나눠 마신다. 어떤 여편네는 한 사내에게 커피를 정성껏 타서 건네기도 한다. 또 어떤 여편네는 어떤 사내더러 '오빠'라고 부른다. 오빠와 동생... 그뿐 아니다.
일인용 연습 부스에 한쌍의 남녀가 들어가 무슨 '연습'을 그리도 거창하게 하는지 나올 줄을 모른다. 남의 여편네가 남의 사내 밝히거나 다른 사내가 남의 여편네 탐하는 걸 통제할 사안은 아니나 막연히 수수방관만 해도 안될 입장이다. 연습실에서 음탕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쉰내 같은 거 말이다. 연습 부스에서 반주기 볼륨을 올려놓고 무슨 짓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중앙 홀에서 과일이나 음료수 가지고 가까워진 남녀들은 끼니때가 되면 저희끼리 '식사하고 오겠습니다'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어느덧 식사까지 자유로운 관계가 된 것이다.
문자가 인간의 감성을 예민하게 만들듯이 -신비주의쯤으로- 음악 장르도 마찬가지다. 남녀가 부스 안에서 하나의 음향기 악보를 놓고 한 명은 멜로디를 연주하고 한 명은 화음을 가미하는 식으로 연습을 반복한다고 가정할 때, 서로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칭찬하고 지적하면서 상호 각별한 관계로 발전한다. 일찍부터 음악을 취미삼아온 입장으로 수없이 목격한 바이다.
사람들이 살 만해지니 웰빙 어쩌고 하면서 산과 바다로 쏘다니거나 뭔가 하나쯤 배우려고 시도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알짜배기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악기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겉멋이 들어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악기를 배우러 왔으면 연습에 전념해야 마땅하다. 악기는 부스 안에 놔두고 웬 잔소리들이 그리 많은지... 이같은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숱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단체로 연습실에 오겠다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회 라인을 통해 그들이 다녔던 연습실 관계자에게 알아보면 이미 잡음의 전력이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마찰과 분란을 일으키는 주범이 된다. 집단으로 위력을 과시한다고 할까? 저희들이 움직임으로써 하나의 단체가 흥하고 망한다고 믿는다. 착각이다. 음악은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므로 혼자서도 가능하다.
몇 년을 다닌 수봉공원 아래 연습실에 갔더니 벽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는 것이었다. 끝내 웃고 말았지만 느낌이 강하게 와 닿았다.
'좆 빠지게 불자!'
오죽하면 그런 글을 내걸었을까? 자신과의 끝없는 투쟁이다.
혼자 사회지도자처럼 떠드는 것 같지만 연습실에선 오직 연습만 하자고 다짐한다. 누가 말을 걸면 가급적 짧게 대답하고 다시 연습에 돌입한다. 중앙 홀 원탁에다 아무리 맛있는 걸 사다놓고 불러도 괜찮다고 사양한다. 집요하게 부르면 나중에 먹겠다고 둘러친다. 커피든 음료수든 마시고 나면 다시 물로 입을 헹구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그냥 불면 관악기 내부에 이물질이 생겨 기능에 제한이 따른다. 자연히 연습의 맥이 끊긴다. 고조됐던 감정이 식어 열기가 없다. 결국 나만 손해다.
사람은 어느 정도 권위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싶다. 농담도 적당한 선에서 맺고 끊어야 한다. 농담을 받아주면 다음엔 더 농밀한 어조로 접근한다. 접근한다는 표현이 그렇지만 아무튼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가 된다. 미소도 쓸데없이 남발할 게 못된다. 사람을 쉽게 본다. 부스 안에서 땀에 젖어 홀로 나올 때 원탁에 앉았다가 다소곳이 '오랜만인데도 정말 멋지세요'하는 여자의 눈가엔 웬지 요염한 티가 흐르는 것 같다. 우리 연습실 여자들이 그렇다는 뜻이다. 색소폰이란 악기를 멋을 내기 위해 배운다고 믿는 모양이다. 겉멋이다.
연습실에선 연습만 해야 한다. 남녀의 탐욕이 전개되고 완성되는 자리는 따로 있다. 대실료 2-3만원이면 호텔급에서 만끽할 수도... 지나친 예단인지 모르지만 악기 연습실이 애정 행각의 물레방앗간으로 변질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