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초복 일담

펜과잉크 2010. 7. 19. 13:15

 

 

 

 

 

과거 시골 면사무소에서 개 세 마리를 길렀는데 이름이 초복이 중복이 말복이였다. 어느 친구의 글에서 재미있게 읽었다. 이 우스개소리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잇는다.

 

오늘이 초복이다. 하지만 난 칠월에만 삼계탕을 열 다섯번쯤 먹은 것 같다. 열 다섯번으로 잡고, 한 번에 12,000원씩 계산하니 180,000원을 삼계탕 사 먹는데 썼다. 그저께는 삼계탕을 두 번이나 먹었다. 점심과 저녁 모두 삼계탕이었는데 저녁 식사에선 어쩔 수 없이 양을 남겼다. 지겹다는 느낌이 앞선 때문이었다. 난 '개국'*은 즐기지 않아도 닭고기나 오리고기는 끊임없이 소화할 수 있다. 송도고등학교 아래 터널 입구 근처 '누룽지백숙'집도 즐겨가는 곳 중 하나다. 이 집에선 닭고기나 오리고기를 시켜먹고 누룽지 한 단지쯤 먹을 수 있다. 양이 많아 남기지 않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주안 일대 삼계탕집을 말하라면 단연 주안1동 <서문통닭>을 꼽을 것이다. 주안8동 <고려삼계탕>도 전통이 있는 집이다. 근래 내가 열 다섯번 가량 먹은 곳은 <고려삼계탕> 집이다. 근처 연습실에서 악기를 불다가 끼니를 맞아 혼자 들러 허기를 면했다. 허기를 면한다는 표현보다는 배를 채운다는 쪽이 맞을 것 같다. 삼계탕이라는 게 인스턴트 식품처럼 간단한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그릇 싹 비우고 나오면서 트림을 해 제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음식이 바로 삼계탕이다. 닭고기는 맛이 담백하고 소화 흡수가 잘되며 필수 아미노산의 함량이 쇠고기보다 더 많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형제들은 다들 건강하다고 믿는데 그 이유가 시골에서 나고 자란 덕분이 아닐까 한다. 초중학교가 십리 안팎의 거리였고 중간에 큰 산이 가로막고 있어 이 길을 9년간 걸어다닌 우리로선 잡초같은 어린시절이었다. 고등학교는 무려 삼십리 밖이었다. 십리 걸어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버스를 타고 십오리쯤 가서 내린 뒤 다시 오리 정도를 걸어야 했다. 이십세까지의 내 삶을 반추해보면 1/3의 삶은 공부를 했고, 1/3은 일을 했으며, 나머지 1/3은 연애질과 잡념으로 보냈다. 농업을 본업으로 하는 환경에선 누구도 제외될 수 없었다. 얼추 장정 한 명과 비등한 몫이었으니... 대규모 엽연초 농가였던 우리집은 학생이라고 공부만 할 수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과거 하와이 이민사에 나오는 알로에농장이나 바나나농장의 노동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담배라는 게 묘판에 씨앗을 꽂는 순간부터 수매공판장에 실려갈 때까지 하루도 손을 거를 수 없는 작물이었다. 담배를 따놓고 새벽까지 엮는 날도 수두룩했다. 담뱃잎을 방치해두면 금세 썩어 더 이상 가치가 없었다. 그래 오늘 따놓고 내일 엮겠다는 이치는 맞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밭이라고 생긴 곳엔 전부 담배를 심었다. 가파른 밭에서 담뱃잎을 지게로 지고 외줄 타는 곡예사처럼  건조장까지 나르는 작업도 체력의 한계에 직면하는 고역이었다.

 

첫째아우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데 마흔시절까지 테니스를 아주 잘 쳤다. 전국 교직원대회에서도 개인 우승을 했다고 들었다. 무릎 관절 수술을 받고 골프로 옮겼지만 그 실력 또한 뛰어난 줄 안다. 둘째아우는 나보다 네 살 아래인데 암벽과 빙벽 등반으로 오래 전부터 프로 수준이다. 작년에도 15일 일정으로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다녀왔다. 한 번은 둘째아우 집에 갔다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층계마다 붉은벽돌이 지그제그(Z)로 세워져있어 물으니 아우가 그걸 밟고 오르내리며 균형 잡는 연습을 한다고... 아무튼 건강의 비결은 시골의 척박한 환경에서 질경이처럼 자라온 결과가 크게 작용하리라 믿는다.  

 

 

북한산 인수봉을 타는 둘째아우

 

 

 

 

 

 

잠시 얘기가 빗나갔는데 내가 삼계탕을 즐겨먹는 이유는 만일의 사태를 염두에 둔 때문이다. 어떤 위기에서도 결코 상대에게 제압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하다. 며칠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새벽에 인천정문학원을 지나다가 삼십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가 비슷한 나이 여자를 때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말리니 참견하지 말라는 식이다. 당시 난 후배직원과 함께 있었는데 급기야 남자가 후배직원을 붙잡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그러지 말라고 십 분 이상 타일러도 듣지 않았다. 말로는 안되겠다 싶어 남자에게 다가가 잽싸게 오른팔을 꺾어 뒤로 잡아올리며 오른발로 그의 다리 한쪽을 걷어 올렸다. 동시에 그의 오른팔을 내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남자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길바닥으로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놈이 반항하지 못하도록 등 뒤에서 팔을 내리누르며 오른손목까지 꺾어버렸다. 남자가 왼손으로 땅바닥을 탁탁 치며 '잘못했습니다'라고 애원을 하길래 풀어줬다. 그의 이마엔 지면과 충돌할 때 생긴 혹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팔로 땅을 짚도록 되어 있는데 당시 그가 술에 취해 신속히 대응하지 못해 발생한 것 같다. 그때부터 사람이 왜 그리 고분고분한지... 나중엔 명함까지 한 장 내밀고 가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롯데OO연구소 직원이었다. 아무튼 내가 남자의 밑에 깔렸다면 직원이나 관중(?) 앞에서 봉변을 당한 거나 다름아닐 것이다. 후배 직원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도 때론 강력한 메시지를 보여줘야만 한다.

 

주방 가스레인지에 큰 냄비 세 개가 있어 열어보니 닭도리탕과 닭죽과 카레가 가득하다. 닭죽을 먹을까? 닭도리탕을 먹을까? 한 그릇 데워 먹고 연습실로 향해야겠다. 하루빨리 과거의 연주 실력을 되찾는 게 중요하다. 복날 다들 충분히 보신하여 더위에도 거뜬히 날 수 있기를 바란다.

 

 

 

 

* 개국 : 보신탕을 이르는 충청 일원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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