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전우>를 그리며

펜과잉크 2010. 7. 12. 11:40

 

 

 

 

KBS1-TV <전우>는 과거 나시찬을 소대장으로 했던 때와는 상당히 다르다. 우선 특집물답게 매우 웅장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나시찬 소대장 시절엔 45분 가량 이어지는 동안 소총 몇 발 쏘거나 수류탄 한 두 개 터트리는 걸로 끝났지만 지금의 <전우>는 아예 총탄을 들이붓더라. 다만 갈수록 예산을 아끼는 듯한 인상이어서 전쟁물서의 진가가 떨어져 보이는 게 아쉽다. 하긴 우리나라 TV극은 초기 방영 몇 회만 거창하다. 시청자들의 기선을 제압해놓고 한동안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막판에서 반짝하는 걸로 끝나고 만다. 한 두번 속은 게 아니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흘리! 흘리는 자연설로 유명한 알프스 스키장 입구 마을이다. 흘리는 이북에 고향을 둔 피란민들이 일시 내려왔다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귀향하던 중 전선에 막혀 정착한 이북민 집성촌이다. 속초도 이북 피란민들이 모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전쟁통에 고향을 등지고 피난 나왔다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흘리처럼 막혀버린 것이다. 과거 흘리는 논이 드문 산간마을로 화전을 개간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 마을은 겨울에 눈이 엄청 내려 고립되기 일쑤였다. 외부 문명과 단절된 마을로 달리 고립될 것도 없지만...

 

흘리는 인제에서 원통을 경유하여 북면 용대1-3리를 차례로 지나 있는 진부령 우측 고개 너머 마을이다. 미시령과 갈라지는 용대3리 삼거리에서 진부령 방향으로 반좌회전한 뒤 -열시 방향- 외딴 도로를 3-4킬로쯤 직진하면 진부령휴게소가 나오는데 바로 이곳에서 우측 오르막 도로를 넘어야 한다. 진부령 정상엔 이중섭 미술관이 있어 달라진 세상의 일면을 실감하게 하지만 우리가 군생활하던 80년대초만 해도 말 그대로 산간 오지였다. 밤이 되면 민간인 차량은 볼 수 없는 구간이었다. 군용차량도 급할 때만 오갈 뿐...

 

흘리 가는 길 반대편, 그러니까 진부령 정상에서 고성 방향을 바라보고 왼편으로 있는 오르막이 그 유명한 향로봉 가는 길이다. 이 도로는 군부대 영내를 관통하는데 바로 군사도로인 까닭이다. 향로봉쪽엔 민간인이 살지 않는다. 요즘은 향로봉 정상 못미친 지점에 국내 제일의 습지가 있어 야생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국방부 협조하에 일시적으로나마 출입하는 걸로 안다. 내 기억에 향로봉만큼 아름다운 산도 드물거란 주장이다.

 

우리나라 전방 군사도로가 다 그렇듯이 고산준령을 엄폐물로 길을 내어 아찔한 난코스가 여러 구간이다. 더러는 아슬아슬하다. 능선을 경계로 아측 지형으로만 도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군사도로는 군인들이 개척했기에 공기(工期)에 숨지거나 다친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미시령 구간도 80년대 초중반만 해도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그저 약초 캐는 현지 주민이나 길을 잘못 든 등산객이 보일 정도였다. 미시령 구간에서도 17명의 병사들이 도로 개척 중 순직한 걸로 안다. 우리가 군 생활할 때 미시령 정상의 큰 돌탑, 그러니까 '미시령'이라고 새겨진 웅장한 표지석 바로 옆에 17명의 명복을 비는 추모비가 있었다. 몇 년 전 아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이 추모비를 사진 찍기 위해 찾았으나 도로가 확장되면서 옮겨졌는지 없어 많이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향로봉 도로처럼 아측에서만 보일 수 있도록 한 것은 적에게 동선(動線)을 보이지 않으려는 전략적 측면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GOP에서 바라보면 피치못한 구간에서만 도로가 노출될 뿐 대부분 산 너머에 가로 혹은 지그재그 형태로 뻗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때문에 피아간 육안으로는 병력 이동이나 장비의 수송 상황을 알 수가 없다. 모든 게 산 너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향로봉 도로는 끝없이 이어진다. 어느 구간에선 산 아래 골짜기가 까마득히 내려다 보인다. 만일 짚차가 탈선한다면 1천미터가 넘는 골짜기 아래로 추락할 것이다. 낭떠러지 개념이 아니라 나무 없이 풀만 뒤덮인 광활한 언덕으로 상상하면 이해가 빠르다. 그런 길이 이어진다. 그쯤에선 멀리 북한의 금강산과 동해바다까지 보인다. 짙은 운무에 산 아래가 폭싹 잠겨있을 때도 있지만...

 

동해쪽(고성 방향)과는 달리 내륙은 험한 지형과 울창한 숲이 앞을 가로막는다. 1996년 강릉 해안에 좌초된 북한 잠수함 승조원들이 함을 이탈하여 북으로 향하면서 향로봉 안쪽 지형을 탈출 루트로 택한 이유도 바로 험준한 산세와 울창한 숲을 엄폐물로 이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걸 우리측에서 미리 알고 매복작전에 돌입했고, 여기서 그 유명한 '연화동전투'가 탄생하게되는 것이다. 지금은 근처에 용대리자연휴양림이 있어 성수기마다 외지인들이 몰린다고 들었다.

 

 

 연화동 전적비

 

 

전적비 안내문 : 상단 오른쪽에 우리부대 마크(불사조)가 선명하다 - 원본 파일

 

 

  

휴양림 근처 산간마을 맨 꼭대기 집 뒤꼍 울타리가 민통선이던 시절도 있었다. 군인 신분인 우리가 그곳을 드나들면서 민통선 안쪽에서 나무하는 주민들을 여러번 봤다. 법이 미치는 않는 지역에선 대통령도 한낱 개뿔일 뿐이다. 그 사람들에게 지붕에다 빨간 고추를 널지 말라 한들 들어먹겠는가. 다만 전방 독가촌(마을로부터 떨어진 외딴집을 일컫는 군사용어)은 집집마다 '딸딸이'라는 유선전화를 설치하여 매일 아침 관할 부대에서 점검한다. 수화기를 들고 본체 우측 'ㄴ'자(字) 발신기로 상대를 호출하는 것이다. 서너 바퀴 돌리고는 수화기에다 '밤새 잘 주무셨지요? 아무 일 없었지요? 사람 소리나 발자국 소리 들으신 적 없고... 조용했지요?' 그러고 끊는다.

 

향로봉 능선 길을 끝없이 행군하면서 낙뢰를 동반한 소나기에 온몸이 굳을 것만 같던 기억이 떠오른다. 난 시골에서 자랐어도 천둥 번개는 아주 무서워서 되똥한 능선길을 가는 전우 중 누구라도 정수리에 벼락을 맞는다면 전원 끔찍한 비극을 면치 못하리란 불안감에 떨었다. 특수부대였던 때문에 GOP 내지 GP 혹은 DMZ 작전에 투입될 때마다 -민통선 안쪽 작전은 수도 없이 나갔다- 개인당 세열 수류탄 4발, K1-A 실탄 500발 정도가 지급됐는데 문제는 수류탄이었다. 하나가 폭발하면 연쇄폭발로 주변이 쑥대밭으로 변할 거라는 걸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한 팀 전우들을 열다섯명으로만 잡아도 세열 수류탄이 60발이었다. 그 중 30발만 터진다 해도... 내 머리엔 온통 불길한 두려움 뿐이었다. 특히 중대장 뒤에 붙어 가는 통신병의 P-77 무전기 안테나가 왜 그리도 불안하기만 하던지... 벼락이 내리치는 상황이면 안테나를 뽑을 법도 하련만 상시 켜놓은 채 '칙칙' 소리를 내며 갔다.

 

눈 감으면 그 시절 일들이 손에 잡힐 듯하다. 향로봉 안쪽엔 비경어린 곳이 수없이 많다. 계곡을 행군하다가 산머루에 취해 모두 덩굴에 매달려 배를 채우던 일, 수정같이 맑은 물에 몸 담그고 더위를 식히던 일, 그리고 계곡을 따라 있는 크고 작은 아름다운 폭포들... 그곳에 무슨 지뢰가 있고 미확인 폭발물이 있는가? 자연에 취하면 다른 건 심중에 없다.

 

시간이 나면 다시 한 번 아들과 함께 현지 여행을 떠나고 싶다. 미시령에 올라 동해바다를 내려다보고, 용대리로 되돌아와 진부령 가는 흘리에 들렀다가 향로봉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서고 싶다. 그곳에 서면 옛날 함께 피땀 흘린 전우들 목소리도 들을 수 있을까? 나는 잠시 환상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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