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이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났다. 혼자 밥을 챙겨 먹다가 주방을 청소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직접 주방을 청소한 게 일년쯤 될까? 아무튼 거의 일년 만에 다시 하는 것이다. 수저를 놓자마자 작업에 돌입했다. 철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가스렌지부터 닦았다. 석쇠를 걷어내 닦고 발화구 주변의 기름때를 제거하는 데에만 한 시간 가량 소요됐다. 기름때는 화력조절 손잡이까지 점령해있었다. 철수세미로 빠짐없이 닦았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스렌지 위에 있는 환풍구와 주변의 장식장까지 닦아야만 했다. 그뿐인가? 벽면도 예외가 아니다. 고무장갑을 끼고 작업했지만 수세미로 밀어내는 기름때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가스렌지와 주변 장식을 닦아내는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됐다. 이어 좀 더 고운 재질의 수세미로 마무리했다. 최종으로 행주의 물기를 최소화하여 전체적으로 정리했다. 그런 다음 가스렌지 불을 켜서 몸체와 주변 습기를 말리는데 주력했다. 냄비같은 것들도 깨끗이 닦아 가스렌지에 올려 살균을 했다.
오늘 청소한 구역은 오직 가스렌지와 주변의 시설물이다. 주방 전체를 청소하는 계획은 따로 날을 잡아 실행에 옮길 것이다. 옆쪽 싱크대와 정수기 주변, 냉장고와 주변을 닦아내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 부분까지 한꺼번에 하기란 무리가 따른다.
주방 청소를 아내에게만 미루기엔 한계가 있다. 아내를 험담할 의도가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다- 아내는 나보다 위생관념이 떨어진다. 20년 넘게 살아봐서 안다. 아내만이 아니다. 아이들 모두 쓸고 닦는 일과 거리가 멀다. 아이들은 그냥 집에서 먹고 자면서 저희들 하고 싶은대로 숨쉬고 살아갈 뿐이다. 아마 청소하며 살아가는 세대는 나를 마지막으로 끝날 것이다. 적어도 우리집에선 그렇다. 오늘 아무리 가스렌지를 반짝이게 해놓아도 아이들은 미처 깨닫지 못할 것이다. 계란후라이가 먹고 싶으면 평소처럼 가스렌지 불을 켜고 커다란 후라이판에 식용유를 끼얹어 바른 다음 계란을 깨어 적당히 익혀 먹으면 끝이다. 뜨거운 후라이판에서 계란이 익혀지는 동안 식용유 입자들이 끊임없이 튀어오르는 현상 따윈 안중에도 없다.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후라이판에 식용유를 발라 계란을 익혀 먹는 동물적 습관에만 길들여져 있다.
이 글을 아우들이 읽는다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우리 형은 그러고도 남는다' 할지도 모른다. 나만이 아니다 우리 형제들은 시골에서 났지만 도시사람들 못지않게 깨끗이 컸다. 나는 요즘도 아우들 옷차림을 보면서 '저 녀석은 옷을 참 멋지게 입었구나'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유명 브랜드 옷을 입는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타이트하거나 캐주얼해도 상하의 색상이 계절과 조화를 이루면 사람이 한층 돋보이게 마련이다. 겨울철엔 온화한 색상의 스카프나 마후라를 하는 아우도 있는데 이런 점도 개성을 살리는 방편이라 믿는다.
'정리의 여왕'이란 인터넷 블로그가 있다. 본문을 쓰기위해 검색하니 유사 블로그가 하도 많아 찾지 못했지만 정리하는데 탁월한 재주와 능력을 갖춘 주부의 블로그란다. 이름이 유명해져 각 기업체에서 강사로 초빙한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언젠가 우연히 그녀의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가 말하는 정리란 '쓸데없는 물건을 과감히 내다버리는 데에서 시작된다'라고 못을 박았다. 명언이다. 따지고 보면 내 주변에 2-3년 동안 쓸모없이 있어온 물건은 앞으로도 2-3년은 쓸모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아깝다거나 언젠가 쓸 일이 있어 집안 곳곳에 보관해두지만 이런 식으로 모이다 보면 집이 잡동사니 천국으로 변할 것이다. 인간의 오만 창조물 중 인간과 무관한 게 있었던가? 결국 정리는 쓸데없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시작된다 해도 과언 아니다.
오전 내내 열심히 일한 내 손을 들여다본다. 기꺼이 칭찬해주고 싶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배고픔이 밀려오는 상황에서도 굽힘없이... 힘든 과정이었지만 결과는 저토록 눈부신 주방의 참모습을 되찾지 않았던가? 수고했다! 남자 손톱치고 긴 게 흠이지만 때 한 점 없이 깨끗하구나.
주방 청소에 몰입하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물주는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다. 미개한 동물과 영리한 사람을 한 집에 살게하여 조화로운 삶을 열어감으로써 지구의 평화를 도모해주신다. 게으른 사람 곁에 부지런 떠는 사람을 두어 한쪽이 굶어죽지 않게 해주신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개가 흘리는 똥을 인간이 치움으로써 쾌적한 환경을 지탱해나갈 수 있다. 흘리면 치우는 사람이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소리를 언제 식구들 모두 있는 자리서 하고 싶다. 실현될 가능성이 낮지만 말이다. 설령 해도 유기견 출신의 우리집 꿈돌이는 눈만 꿈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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