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삼경에 이르러 주안1동 시민공원을 지날 때였다. 누가 불러 돌아보니 웬 아주머니다. 상담을 할 수 있냐하여 그러라 하자 건축업을 하던 시동생이 3개월 전부터 연락이 끊겨 온 가족이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됐던 곳이 서울이라는데 어디에 있는지, 혹시 나쁜 일을 당한 건 아닌지 불길함이 꼬리를 문다는 하소였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건축업하는 분이라면 업체 도산으로 구치소에 있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내일 낮에 확인하여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분 시동생 인적사항과 전화번호를 받았다.
이튿날, 관내 구치소 수용기록과에 전화를 걸어 사연을 설명하고 인적사항을 말해주자 전산조회 결과 성동구치소에 수용되어 있단다. 나는 또 그 사실을 문자로 아주머니에게 전송해주었다. 그랬더니 몇 시간 지나 전화를 걸어 '너무나 고맙다'는 것이다. 동서는 물론 온 가족이 기뻐 난리란다. 그 정도 애뜻한 처지에 3개월동안 뭘했나 싶었지만 때론 손으로 쥐어줘도 모르니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아니었다. 아주머니는 내 친절에 감동 받았노라는 말까지 해주었다. 때론 간단하고 작은일도 상대방에겐 잊지못할 감동이 될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수시로 문자와 전화가 왔다. 이 정도라면 감동이 감정으로 변질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대부 포도를 샀는데 어디세요?'
내 답변은 한결 같았다.
'연습실입니다.'
'죽을 끓였어요. 드릴까요?'
'연습실입니다.'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어디세여?"
'연습실입니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연습실입니다.'
'어디세요?'
'연습실입니다.'
사실 연습실이었다. 휴무일은 집 아니면 연습실에 있는 몸이니 피치못할 답이다. 몇 번 반복되는 연습실 소리에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더 이상 문자와 전화가 오지 않는다. 아마 속으로 '그래. 연습실에 처박혀 뒈져라' 저주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 포도를 먹으면 뭐할 것이고 식사를 하면 뭐할 것인가? 감동은 감동으로 끝나야 가슴의 느낌표가 지속되는 법이다. 아니 그런저런 것보다 악기가 우선이다.
연습실 소개가 길었지만 내게 연습실은 휴식처이자 도피처이다. 날씨와 기후에 관계없이 연습실에 있으면 마음 편하다. 사람과 두루 어울려야 성공하는 현대인의 처세술 측면으로 보면 현저히 다른 삶이지만 나로선 아주 편안한 공간이다. 색소폰이든 트럼펫이든 연습하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다리 아프고 몸 피곤하면 중앙 홀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보며 쉰다.
악기를 취미로 하는 사람으로 최근 추이를 말하라면 요즘은 음악하는 사람들의 형편이 매우 높아졌다는 점이다. 색소폰을 보더라도 그렇다. 단순히 악기라는 개념을 떠나 부(富)의 상징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2천만원에 육박하는 악기가 드물지 않다. 대체 그 정도 고가의 악기를 어떻게 목에 걸고 불 수 있는지 모르지만 자칫 보면대에 벨이 부딪혀 찌그러지면 속이 새까맣게 탈 것이다. 마우스피스만 1백만원을 호가하는 제품들이 수두룩하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이 드신 분들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직장을 퇴직하고 느즈막한 나이에 뱃때기를 남산처럼 하고 나타나 색소폰을 한답시고 거드름 떠는 인간도 있다. 복식호흡은 아는지... 불쌍한 인생!
연습실 회원들의 직업을 보니 관공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다. 교사로 재직하는 사람들도 셋이다. 우리집 막내 지석이 은사님도 있다. 가정주부도 있다. 그런데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 가치관은 직업과 동등하게 논할 게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내 상식으로 부스 안에 남녀가 들어가 한 시간 넘게 혹은 두 시간 가까이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연애를 하려면 시청 앞으로 가서 모텔을 찾을 일이지 지하 연습실 부스에서 뭐하는 건지... 이런 식의 표현을 두고 혹자는 성급한 예단이라 꼬집을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남녀가 부스안에 들어가 오래도록 있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나는 단체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떼로 움직이며 세(勢)를 과시하는 사람들 말이다. 몇 씩 무리로 철새처럼 이동하면서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오면 다섯 명은 자동으로 따라올 것이오. 대신 내 회비를 면제해주쇼."
이런 식의 조건을 제시하는 사람의 행적을 되짚어 보면 예전의 단체에서 물의를 일으켜 방출된 명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볼링 동호회든 낚시 동호회든 등산 동호회든 마찬가지다. 또한 인터넷을 매개로 형성된 동호회는 반드시 남녀간의 정사가 공식처럼 따라붙는다. 물 흐르듯 조용히 가는 예가 드물다. 함께 볼링을 하다가 눈이 맞는다. 낚시를 다니다가 눈이 맞는다. 산행을 하다가 눈이 맞는다. 악기도 마찬가지다. 관악기 동호회에서 활동하다가 이상한 패턴으로 흐르는 예를 여러번 봤다. 본연의 궤도를 벗어나 추악한 형태로 변질되는 것이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색소폰을 배우려 작정했으면 색소폰을 절대 마음의 중심에 놓고 움직여라. 이것만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기본 스케일도 완성하지 못하고 유명 연주인을 흉내내려 한다면 이미 본분을 상실한 거다. 그런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켜 회원간 불협화음을 조장하거나 주변 회원들로부터 원성을 사는 예가 적지 않다. 낯선 사람들이 연습실에 와서 얼굴 익히고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가는 등 '오빠' '동생' 어쩌고 하는 걸 보면 꼴불견이 따로 없다. 대체 언제부터 '오빠' '동생'이었나? 개소리 말고 연습이나 똑바로 하라. 미친놈, 실성한 년처럼 히히덕거리지 말고...
물론 남녀간 연애관이 초스피드로 변하는 세태를 보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항상 과한 행태가 문제다. 이러한 말을 끝으로 펜을 놓는다. 연습실 제목에 부합되는 내용으로 이어졌는지 모르지만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좀 더 건전하고 발전적으로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雜記 > 이 생각 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죽 점퍼 바로보기 (0) | 2010.11.08 |
---|---|
싱글방 (0) | 2010.10.26 |
안경에 관한 불편한 진실 (0) | 2010.10.13 |
안경을 놓치다 (0) | 2010.10.11 |
무릇 이야기 (0) | 2010.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