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만 더 지나면 올해도 마지막이다. 시간이 왜 이리 빠를까?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에 술렁였던 때가 엊그게 같은데 그 새 일년이 훌쩍 가버렸다. 밝아오는 신묘년은 토끼의 해라 했던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토끼처럼 지혜롭게 난관을 헤쳐나가길 소망해본다. 언론에선 금년도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달성할 거란 예측을 내놓고 있다. 2만달러면 뭐하나? 소득분배가 균등히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선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대기업의 배만 부풀리는...
지난 12월 15일,
부평호텔 별관 컨밴션센타 3층 자스민홀에선 <굴포문학> 제17집 및 문광영 교수님의 시평집 발간 기념회와 굴포문학 송년의 밤 행사가 열렸다. 내게도 작은 역할이 주어져 주안8동 연습실에서 장비를 챙겨 오후 4시 45분에 출발했다. 근데 도화1동 경인고속도로 입구에 들어서니 정체현상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40-50분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는데 오후 6시 20분쯤이 돼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고속도로에서 정신적으로 시달린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온 신경이 곤두서고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아무튼 기적과도 같이 무사히 도착하여 내가 맡은 역할을 그런대로 수행해낼 수 있었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은 홀의 맨 앞에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엔 김영승 시인이 앉아 계셨다. 문광영 교수님 시평집 발간과 관련하여 축시를 낭송하시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뵈었지만 예의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그 손을 한참이나 잡고 싶은 마음으로 악수를 했다. 시간이 흘러도 형님의 모습은 하나 변함이 없었다. 그 새 인겸이가 대학생이 되었단다. 어린 자식들 이야기에 공감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역시 시간은 참 빠르다.
나는 비록 색소폰 연주를 맡아 후회하지 않을 결과를 위해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한 곡을 연주하더라도 음향장치만은 제대로 갖춰놓고 싶었다. 그래 식순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 양편을 오가면서 부지런히 장비를 세팅해나갔다. 어느 순간 고경옥 선생님이 카네이션 한송이와 명찰을 가져와 가슴에 꽂아주셨다. 그 때 처음 고경옥 선생님과 가까이 했는데 여느 때보다 정답고 각별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고경옥 선생님은 지난 10월, <월간문학>에 시(詩)로 추천을 받아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하셨단다. 아무튼 자스민홀의 카네이션을 집으로 가져와 아버지의 작은 영정 앞에 며칠 꽂아드렸다.
굴포문학 동인회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모두 훌륭하신 인격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깎듯하다. 예의를 갖추니 내쪽에서도 매사 조심스럽다. 이런 점은 인천문협과 비교된다 하겠다. 인천문협은 부탁을 하면서도 시종부리듯 아래로 굽어보듯 한다. 여럿 있는 데에서 색소폰 연주하라 하면 좋아 환장할 놈처럼 보이나 보다. 거듭 말하지만 난 깡통 실력에 비해 색소폰을 처음 만진 게 중학교 2학년이던 1975년도다. 지금까지 오면서 몇 년씩 그만 둔 경험으로 이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연주해본 경험은 많다. 고작 그런 일에 흥분할 나이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다음부턴 초청을 하더라도 굴포문학처럼 정중히 격식을 갖춰 주었으면 한다. 혼자 장비 운반하여 세팅하고 악기를 조립하여 입에 대고 태연히 연주하는 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 짓을 하면서 왜 천대받는 인상을 받아야 하는지, 솔직히 감정이 곱지 않다.
이년 전인가, 인천문협 송년회에 색소폰 프로 연주자를 초청한 적이 있다. 집행부에서 사례비를 드리겠다하여 부평구 삼산동 소리엘색소폰학원 조주현 원장을 초청했다. 이 분은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우리 민요를 구성지게 연주하는 실력을 인정 받아 한때 뽀빠이 이상용 씨와 중국내 조선족자치주를 다니며 공연을 했던 화려한 전력의 소유자이다. 연말이라 무척 바쁜 상태였지만 나와 각별한 관계라 딱히 뿌리치지 못하고 하인천 파라다이스호텔까지 와서 연주를 해주셨다. 그 시간에 부평구 삼산동에서 하인천 파라다이스호텔까지 차에 장비를 싣고 이동한다고 생각하면 보통 성의가 아니다. 그런데 그 분이 다녀가고도 집행부에선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돈 얘기를 먼저 꺼낼 수도 없고 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지금까지 꿩 구워먹은 소식이다. 그 뒤로 내가 조주현 원장께 심적으로 빚을 진 기분은 달리 설명하고 싶지 않다. 사람을 어떻게 봤는지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는 신용을 얻기 힘들다. 애초 조주현 원장에게 부탁할 땐 당연히 사례가 있으리란 암시를 줬는데 결과가 이러니 누굴 섭외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사람의 일이란 실수가 따르기 마련이지만 몇 번 유사한 경험을 겪으니 의도적인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어 진정성이 서지 않는다.
굴포문학 송년의 밤 행사를 다녀온 며칠 후 아들과 제주도로 향했다. 굴포문학 송년의 밤 행사를 마치고 난 후 긴장이 풀어져 몸살 기운이 있는 상태로 떠나 현지에서 고생 좀 했다. 그래도 제주도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다녔다. 먹고자는 문제가 중요하다 싶었는데 호텔도 오성급으로 충분했고 식사도 아주 좋았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들어오면 아들과 택시를 타고 구제주 시내를 이잡듯 뒤졌다. 오래된 문구점에 숨어있을 만년필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단 한 자루도 구입하지 못했다. 이 점이 2%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에 가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찾아볼 생각이다.
한 해를 마치면서 돌아보고 싶은 일들이 많다. 다름아닌 사람들과의 인연이다.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여 내 삶을 더욱 살찌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인천문협 뿐 아니라 굴포문협 회원들도 내내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시길 기원한다.
* 조주현 원장의 알토색소폰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