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역시 죽마고우다. 내게 죽마고우는 다섯 정도다. 지금 이 나이 이르러 그 정도 친구도 많다고 믿는다. 객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변함없는 우정을 이어간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 친구는 어려서부터 한결 같다. 물론 각자의 개성이 있으나 서로 잘 알기에 낯을 붉힐 일이 없다. 나로선 친구들과의 우정이 각별한 만치 부모님과 친구들의 부모님들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쇠토막도 먹어치울 왕성한 나이에 떼로 몰려다녀도 어느 분 하나 싫은 내색을 하시지 않았다. 우리집의 경우, 어느 겨울날, 공교롭게 쌀통이 바닥을 보일 때 내가 친구들을 데리고 오자 아버지께서 볏가마를 메고 2킬로 눈길을 푹푹 걸어가셔서 방아를 찧어오셨다. 친구들이 돌아가면 한 마디 핀잔도 주실 법 하련만 나는 그런 소리 한 번을 듣지 않고 컸다. 지금은 다섯 친구 중 내 어머니만 유일하게 계실 뿐이다.
친구들의 삶도 참 다양하다. 특별히 나은 친구 못한 친구가 없지만 좀 더딘 삶을 사는 친구들이 있어 안타깝다. 두 친구인데 한 친구는 나보다 한 살 많은 경자생으로 아직까지 결혼을 못했다. 약관시절에 중동을 두 번이나 다녀왔으나 부친 병구완으로 모두 소진하고 지금껏 빈털털이로 산다. 사람이 평생 세 번의 기회를 맞는다는데 그렇다면 친구의 기회는 중동에서 일하던 바로 그 시기였을 것이다. 그 때 국내로 송금해온 돈만 잘 관리했어도 친구의 삶이 저러진 않을 것이다.
또 한 친구는 좀 다른 상황이다. 그 친구는 중산층에서 밑바닥으로 추락한 경우다. 우리 어릴 때 친구의 집에 가면 밥상마다 조기와 김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집처럼 밥상이 온통 그린필드가 아니었다. 친구의 부친은 우리 초등학교 시절 은사님으로 우리 나이가 소년기일 땐 교장으로 재직하셨다. 친구는 집안 형편이 좋아 돈 씀씀이가 제일 나았고 옷차림 또한 남달랐다. 한 마디로 '때깔'이 돋보였다.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신데 일찍부터 전북사대부고로 발령이 나서 근무했다. 세 누님도 모두 알아주는 미모였다. 큰누님은 군청 공무원과 결혼했고 둘째누님은 서울의 의사에게 시집갔다. 우리가 친구 집에 드나들 때마다 밥상을 차려주던 셋째누님은 가사에만 종사했는바 훗날 군산으로 시집갔다. 심성이 착했던 그 누님을 한 번 봤으면 싶은데 여건이 마땅치가 않다. 친구에게 자꾸 보고 싶다 말하는 것도 좀 그렇고... 친구의 전언에도 언젠가 우리들 얘기를 꺼내면서 한 번 보고 싶노라 하더란다. 살다보면 만날 날이 있겠지. 어려선 수줍은 나머지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지만 지금 만나면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직장에 들어온 직후까지만 해도 친구는 면에서 가장 잘 나가는 환경이었다. 친구는 큰누님의 자가용 기사로 일했는데 월급이 파격적이라 들었다. 문제는 큰누님의 직업이었다. 오래전부터 사채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일수 사채 말이다. 사업(?)이 잘되자 지인들의 자금까지 끌어들였다. 면내의 많은 사람들 돈이 친구를 통해 큰누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날 사업이 부도가 나고 말았다. 17년 전 부여군을 떠들썩하게 했던 바로 그 사건이다. 부도 이유를 알고 있지만 여기선 밝히지 않겠다. 한 순간에 천당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친구는 채권단에 집과 전답 및 임야를 몽땅 빼앗기고 수 년을 남의 집 비육우 육성 축사 목부로 일했다. 머슴보다 천한 직업이 목부다. 목부 뿐인가? 가축을 다루는 직업은 노예나 다름없다해도 과언 아니다. 새벽부터 밤 늦도록 짐승들을 돌봐야 하니 말이다.
객지에 나와 살지만 친구 소식은 수시로 들을 수 있었다. 내 부모님도 친구 말씀을 하실 때면 안타까움에 큰숨을 내쉬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란 D가 오늘날 저러고 사는 모습을 보면 딱하기 그지없구나."
부모님이 여러번 하신 말씀이다. 부모님은 자식 떠난 고향에서 신대리 방앗간에 쌀을 찧어놓고 자식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몇 번을 갖다 먹으라 하신 걸로 안다. 그래서일까? 재작년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마지막까지 장지에 남아 봉분의 잔디를 다져 두들기던 친구도 그 친구다.
연초에 마음을 먹기로 했다. 영원한 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논 위탁영농을 맡은 선배집에서 쌀 한 가마를 갖다 먹도록 한 일이다. 선배께 전화를 걸어 정미기로 쌀 한 가마니를 찧어 친구에게 주시라 부탁드렸다. '형편이 떨어지는 친구랑 나눠먹는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물론 선배도 이웃마을 내 친구를 잘 알고 있다. 친구는 지금도 월급을 정산해 수령하는 직장엔 재직할 수 없다. 들리는 말로는 평생을 갚아도 못갚을 돈이란다. 법 제도가 개정되고 세월이 흘렀으니 친구도 그만 구제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친구가 좋으면 친구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각별하다. 사람 마음이 그렇다.
며칠 전, 장롱을 뒤지다가 오래된 가죽파카를 발견했다. 20년 전 월급에 버금가는 돈으로 구입한 국산 가죽파카는 체중이 떨어져 체격이 바뀌면서 입지 않았다. 그러니까 거의 장롱에만 걸려있던 옷이다. 세월이 흘러 꺼내보니 빈티지한 외형에 한껏 멋이 있었다. 몸에 걸치니 역시 크다. 사진 찍어 인터넷에 팔아먹을까? 장롱에 다시 걸려는 찰라 번개처럼 스치는 사람이 있었다. 오래 전, 내가 그 파카를 입고 출근할 때마다 옷을 만져보며 부러움을 숨기지 못하던 직원이었다. 직원은 나와 같은 충청도 출신에 -엄격히 말해 충청남도- 무척 검소한 성품이었다. 월급때마다 두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걱정하던 순박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화평동 솔빛주공아파트에 사는 직원 근무처를 수소문하여 해당부서를 알아냈다. 지체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정문 앞으로 갈테니 정확히 몇 시에 만나자 했다.
후사경으로 보니 저만치 직원이 막 뛰어나온다. 한파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날에 딕레드 울티에 콤비만 달랑 걸친 옷차림이다. 점퍼가 있을지 모르나 어쨌든 내 마음엔 오차가 있을 수 없었다. 서정을 뛰어오는 직원을 보니 내 옷이 딱 맞을 것 같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반가워하는 직원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곤 조수석에 있던 가죽파카를 냅다 건네주었다. 직원이 얼떨떨한 표정이다.
"한참 운동할 때 입었던 옷입니다. 보다시피 깨끗해요. 지금은 귀한 가죽입니다."
당분간 한파가 이어질거란 예보다. 날씨 때문인지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삐뚤어진 발상인지 모르지만 내 뇌리엔 고향의 두 친구와 가죽파카를 입고 있을지 모를 직원이 먼저 떠오른다. 보호시설의 피보호자들은 다른 봉사단체에서 열심히 도와주실 것이다. 내겐 왜 자꾸만 고향 친구가 불우이웃으로 보이는 걸까? 월급 때마다 자식의 학비와 생활비를 걱정하던 동료 직원을 돕고 싶은 마음이 먼저다. 가진 것 없지만 나눌 수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만년필도 한 두자루쯤 꼭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줘야겠다.
'雜記 > 이 생각 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억을 찾아 떠난 여행 (0) | 2011.01.22 |
---|---|
딸과의 재회 (0) | 2011.01.16 |
거룻배 (0) | 2011.01.11 |
연말 상경기 (0) | 2010.12.31 |
인천문협 전망(展望) 예시(例示) (0) | 2010.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