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소재지에서 우리 마을까지는 십리가 넘는다. 들판 지나 산모퉁이 돌고 저수지 둑과 성황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러고도 산중턱길을 더 걸어야 마을이 보인다. 지금은 교통수단이 좋아져 시내버스 노선에 의해 하루 네 번 버스가 드나들지만 과거엔 순전히 걸어다녔다. 마을엔 주막이나 송방이 없었다. 성냥이나 빨래비누가 떨어지면 동생과 먼길을 걸어 이웃마을 가중리 송방까지 다녀와야 했다. 아버지 담배 심부름으로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다가 우리끼리 눈싸움 하고 노래 부르던 시절이 꿈만 같다.
가중리는 면소재지서 우리 마을에 이르는 도중의 마을로 규모가 제법 컸다. 주막이 두 군데, 송방이 세 군데였다. 한때는 새마을공장이 있어 인근 처녀들이 고정 출근하였고 주변을 서성이던 청년패들로 북적일 정도였다. 가끔 청년들이 내게 딱지로 접은 편지를 건네주며 우리 동네 사는 택순이 누님에게 전해달라는 부탁도 했던 기억이 난다. 가중리는 사통오달로 뻗은 갈랫길이 있어 이곳을 시점으로 내지리 각대리 합수리로 향하게 된다. 과거엔 면소재지 예배당 다녀오는 산골 아이들이 가중리 패들한테 얻어맞기도 했지만 그건 아주 드문 일이었고 나처럼 수시로 면에 드나드는 아이들은 오히려 또래들과 인사를 나눌 정도가 됐다. 나중엔 터놓고 지내는 동년배를 친구삼아 서로 동네로 마실 다니며 어울리는 사이로 발전했다. 따지고 보면 가중리 사람들 대부분이 선량한 편이었다.
그런데 가중리엔 딱 한 사람이 불안했다. 김영찬이라는 사람이었다. 평소 주민들로부터 사람 좋다고 칭찬을 많이 듣는 성품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인사를 해도 항상 밝게 웃으며 잘 받아주었다. 바깥에 다니면서도 어른을 뵈면 큰소리로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소를 몰 적에도 늘 열성이었다.
'쩌쩌~, 이놈아. 앞만 보고 가라이. 한나절만 고생하면 이 산 밭뙈기쯤은 확 갈아엎을 것이로되...'
언제나 낙천적이었다.
그런데 그에겐 술이 문제였다. 평소 싹싹하고 인사성 밝아 만인으로부터 인정을 받다가도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술 마시고 취하는 건 당연하여 가령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복숭아를 연상케하는 볼이라면 귀엽기도 하련만 그는 좀 다른 사람이었다. 술 취하면 꼭 전봇대에 오르는 버릇이 있었다. 변압기나 애자 얽힌 상부에는 이르지도 못하면서 혼자 꽥꽥 소리를 내질렀다. 산으로 치면 8부 능선쯤 올라 한 손으로 나사식 손잡이를 움켜잡고 다른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놈들아. 내가 김영찬이다아! 나를 깔보지 마라아. 나를 우습게 봤다가는 다 뒈진다!'
그런 식이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김영찬 씨 행동을 보며 아쉽게 내뱉는 말이 한결 같았다. 그의 고약한 술버릇 때문에 가중리 사람들까지 욕을 먹는다고... 그럴지도 몰랐다. 누구든지 한번쯤 김영찬 씨가 평상심일 때 알아듣게 귀뜸을 주면 그의 의식에 변화가 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일에 팔 걷고 나설 이가 몇이나 되는가. 자기에게 곧바로 해가 되지 않으면 수수방관하듯 하는 게 인간사이다.
김영찬 씨는 점점 무서운 상대가 없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면장으로 정년퇴임하신 이부상 마을 어른께도 술 취한 입으로 막말을 내뱉는 꼴이 됐다. 평소 안 그런 사람이 술만 취하면
'이 놈팽아. 네가 마을을 위해 대체 무슨 일을 했어? 엉? 말해봐! 나만큼 동네에서 일해봤어? 앞산 벌목장에서 일해봤어? 수리조합 인부에 동원되어 봤어? 네가 한 일이 뭐야?'
어느 겨울, 김영찬 씨는 또 술에 취해 전봇대에 올랐다. 마을 한복판 논바닥의 전봇대였다. 예전에도 몇 번 올랐던 전봇대이다. 하지만 그날은 사정이 달랐다. 전봇대에 올라 열심히 소리를 지르던 김영찬 씨가 그만 손을 놓치고 아래로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논바닥엔 온통 지난가을 추수때 베어나간 포기턱이 쇠말뚝으로 얼어 하늘 향해 만세 부르는 상황이었다. 김영찬 씨는 '아얏' 소리도 못하고 현장에서 단명해버렸다. 그래 지금은 삼가 고(故) 김영찬 씨인 것이다.
요즘도 사람들은 가끔 말을 한다. 가중리 주민 모두 허물없는 사람들이라고... 딱 한 사람 김영찬 씨가 문제였다고 말이다. 그때 가중리 사람들은 왜 김영찬 씨의 못된 술버릇을 지적해주지 않았을까? 김영찬 씨에게 밉보여 전봇대 위에서 욕을 듣는 불상사를 염두에 두었던 때문일까? 가중리를 지나노라면 술 마시고 인간이 '개똥' 같아지던 김영찬 씨가 생각난다. 사람의 술버릇 때문에 마을 전체가 한때 안좋은 소리를 들었다. 문제의 소지가 사라지고 나니 동네가 확 달라지더라. 그 후 가중리는 아주 평온한 동네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태평성대 가중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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