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장필현]
역사는 언제부터 의자왕이 3천궁녀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양 널리 한국인들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아니, 이젠 화석이 되어 모두가 그렇게 믿고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부여에는 3천궁녀가 살았을 궁터나 건물이 없었음이다. 부소산성의 규모로 보거나 660년 당시 부여에 살던 인구가 한 연구에 의하면 5만 명 이내라는 사실을 보아서도 3천궁녀는 역사적 진실이 아닌 허구요 뻥에 불과하다. 3천궁녀라니? 너무들 하다.
의자왕은 후사도 없어 임금자리를 다른 왕족에게 넘겨야했던 왕들보다는 많은 왕비를 둔 것은 사실 같다. 자그마치 41명의 후손을 남겼다하니, 조금 많은 수의 왕비를 둔 것은 사실 같다.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아무리 많아야 수십 명 이내일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건 의자왕은 왕비도 많았고 자식도 많았지만 백제사직을 지키지 못한 면에서 자식 못 둔 정력 약한 임금과 돗낀갯낀이었지만......
하물며『삼국사기』에는 의자왕에 대해 평하기를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용감하고 대담하여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이 왕위에 있은 지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그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고 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제 인들은 의자왕을 중국의 증자와 같은 동방의 성인이라 하여 ‘해동증자’로까지 추앙하였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와는 반대의 기사도 눈에 띄니, 의자왕 16년 조에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 충(成忠)이 극력 말렸더니 왕이 성을 내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 멸망 후 그 원인을 방탕함에서 찾으려 누군가 이 구절을 끼워 넣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 후 승리자의 입장에서 백제 의자왕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에서 그랬지 않나 싶다.
하여튼 의자왕이 그 좁은 부소산성에서 궁녀를 3천명 씩이나 거느리고 살았다는 것은 당시의 사비성 규모나 부소산성의 규모, 의자왕에 대한 인물 평가 등으로 볼 때 3천궁녀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수치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백제 멸망 시 나이 60도 넘은 의자왕이 무슨 아주 특별한 비아그라라도 먹고 어디 세계적인 카사노바라도 되었단 말인가?
의자왕의 3천궁녀 이야기는 한참 후대인 조선시대의 한 문인이 술 마시다 백제의 멸망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아무리 많아야 수 십 명에 지나지 않았을 궁녀 수를 3천명으로 과장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를 일제시대에 대중가요 속의 가사로 집어넣으니, 가수 김정구가 구슬프게 불러 더욱 애간장을 녹이던 ‘낙화삼천’으로 대 히트를 치지 않았던가? 허구에 의한 가사지만 억압과 착취에 억눌리던 식민지 백성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던 노래였다. 그 가사 1,2절을 보자.
1.반월성 넘어 사자수 보니
흐르는 황포돛대 낙화암을 감도네
미풍은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고란사 저문 날엔 물새만 운다
물어보자 물어봐 삼천궁녀 간 곳 어데냐
물어보자 낙화 삼천 간 곳이 어데냐.
2.영월대 우에 송월대 우에
달만은 옛날같이 두거두거 하건만
옛 님은 어디 가고 물새만 울어
눈 속에 발길을 멈추게 하나
물어보자 물어봐 삼천 궁녀 간 곳 어데냐
물어보자 낙화 삼천 간 곳이 어데냐
(반복)물어보자 물어봐 삼천궁녀 간 곳 어데냐
물어보자 낙화 삼천 간 곳이 어데냐.
라고 부르니, 얼마나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을까.
꿈꾸는 백마강이라는 대중가요에도 3천궁녀란 가사가 나오고 ‘백마강’ 노래의 3절 가사 중에도 나온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 맺힌 물새가 날며.
일편단심 목숨 끊은 남치마가 애닮구나!
아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하면서 부르는 대중가요는 듣는 이로 하여금 너무나 애잔하게 들린다. 아마도 식민지 지배자로 조선에 온 왜놈들도 이 노래 듣고 슬퍼하지 않았을까?
백제의 멸망과 조선의 멸망이 어찌나 그렇게 샴쌍둥이처럼 보였던지, 삼천궁녀란 가사가 들어간 낙화삼천은 60년대까지도 광풍을 일으키며 인기 가요가 됐다.
더욱 낙화암이란 이름조차 백제시대에는 없었다. 이를 처음 사용한 것은 고려조 이 색(李穡)의 부친인 이 곡(李穀:1298 ~ 1351)이 부여를 둘러보고 ‘하루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천 척의 푸른 바위를 이름 하여 낙화라이르노라!(一日金城如解瓦 千尺翠巖名落花)’라고 노래 부른 것이 처음이다. 또한 고려 말기의 이존오(李存吾:1341 ~ 1371)가 ‘낙화암 밑의 물은 호탕한데 흰 구름은 천년을 속절없이 떠도는 구나!(落花巖下波浩蕩 白雲千載空悠然)’라고 하여 사용한 흔적이 있다.
일연이 지은『삼국유사』에는 낙화암을『백제고기』를 인용하여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궁녀가 빠져죽었음은 역사적 사실로써 기록하고 있으니, “그 날 궁인(궁녀)들이 왕포암(王浦巖:현재의 낙화암)에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삼국유사』권1 태종 춘추공 조)"고 적혀있다. 백제멸망 때 당나라 병사들에게 겁탈당할 수 없다는 백의민족으로서의 순결함과 지조를 지키려는 굳은 마음과 나라가 망한 슬픔을 못 이겨 궁녀가 빠져죽었다고만 했지, 숫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낙화암이란 단어는 강원도 영월에도 있다. 비취색 푸른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동강에도 낙화암이 있으니, 조선조 초기 단종이 포악한 삼촌 세조의 명으로 사약을 받자. 그를 모시던 일곱 시녀와 시종들이 바위 위에 올라 푸른 동강위에 몸을 던지니, 그 바위 또한 낙화암이라 한다.
백제 역사상 가장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은 나라까지 망한 터에 3천궁녀를 데리고 살았다고 잘못 알려진 의자왕일 것이다. 방탕한 군주로 잘못 알려졌으니, 그는 죽어서도 억울하여 중국 땅 황토 밑에서도 제대로 누워있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사서 그 어디에도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언제, 누가 그런 왜곡을 해놓았단 말인가.
사실 3천궁녀란 이야기의 시작은 백제나 신라, 고려시대도 아닌 한참 후대인 조선시대부터 나왔다. 한 조선 문인에 의해 시작됐다. 즉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민제인(閔齊仁:1493~1549)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가 지은『입암집』총 6권 중에 ‘백마강부’라는 시가 있다. 그 시에 처음으로 ‘3천궁녀’란 단어를 사용했다한다. 시를 쓰면서 처음으로 ‘궁녀 수 3천’이라고 근거 없이 과장하여 쓴 한 문구가 이후 낙화암과 3천궁녀로 자가발전 하여 수많은 문인들이 즐겨 시작(詩作)의 대상으로 삼았고, 애닮은 대중가요의 가사로 뜨게 된 것이다. 역사란 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보태지고 왜곡되어 후세인들의 입맛에 따라 변질되고 덧칠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이고 민중들이 부르고 찾는 애닮은 망국사의 한 페이지인 것이다. 망한 백제나 마지막왕인 의자왕만이 죽일 놈이 됐다가 시 한수 읊을 대상으로 됐다가 후세인들에 의해 자유자재로 요리되고 흠집을 당하고 폄훼되고 있을 뿐이다. 하여 패자는 입이 있어도 말이 없나니...... 백제의 한이로다.
조선시대의 한 문인이 백제 멸망이 너무나 아쉬워 그 책임을 의자왕의 있지도 않은 삼천궁녀란 과장법으로 장탄식하며 썼던 시 한 수에서 시작된 의자왕의 억울함이여. 그러나 백제 멸망 시 “왕은 태자 효(孝)·왕자 융(隆) 및 대신·장사 88명, 백성 1만 2000여 명과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당시 낙화암에서 배를 타고 진주군 최고 장수인 소정방을 따라 중국으로 떠날 때 수많은 백성들이 울고불고 매달리며 의자왕 일행을 떠나보내니, 그 때의 애끓는 백성들의 숫자는 족히 3천은 넘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충남지방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백제의 노래 ‘산유화’가 백제 유민들이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라 전한다. 특히 금강 어귀에 있는 유왕산(留王山)의 전설이 자못 의미 깊다. 유왕산의 뜻은 말 그대로 ‘왕이‘머문 곳’이라 해서 유왕산(留王山)으로 붙여졌다 한다.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이 태자 융, 그리고 1만 2천 명의 백성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갈 때, 잡혀가는 의자왕을 사비성의 관문인 구드래 나루에서 금강을 따라 유왕산까지 뒤따르며 통곡 하면서 왕이 떠나는 길을 배웅했다 전한다. 어쨌든 역사적 사실인지 견강부회인지는 몰라도 애닮은 백제의 멸망을 아쉬워함은 매 한가지였을 것이다.
* 註 : 게시자에 의해 일부 편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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