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친구 양현이

펜과잉크 2005. 7. 22. 10:44

 

 

 

초등학교 동창이며 초등학교 동창의 남편이며 초등학교 마을에서 가장 먼 동네로 꼽히는 각대리 출신의 축구 잘하던 단신은 이양현이란 이름이다. 첩첩산중 동네에선 오늘날 서울남부지법원장으로 근무하는 이광열 선배 같은 인물도 나왔다. 이양현은 이광열 선배와 근촌지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동창이며 초등학교 동창의 남편이며 초등학교 마을에서 가장 먼 동네로 꼽히는 각대리 출신의 축구 잘하던 단신 이양현은 1972년 여름 폭우때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살아난 기적같은 목숨이기도 하다. 비가 억수로 오는 날, 어딜 가려고 집 앞 똘캉을 건너뛰다가 그만 보폭이 모자라 불어난 물에 휩쓸렸다는 것이다. 성난 물발에 쓸린 어린 몸은 돌과 바위에 짓찧어지며 한참을 떠내려가다가 무의식중에 내저은 손에 나무뿌리가 잡히면서 살아났다. 그나마 휘몰아치듯 하는 마을 중심천에 합류되기 전이라서 다행이었다. 그날 인근 지역에서 물에 쓸려간 어른 한 분은 오늘날까지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다.

양현이는 나무뿌리를 잡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온몸이 상처 투성이였다고 한다. 그의 상처는 수해 직후 면사무소 조사요원들이 출장 나와 수해보상금 지급 대상을 조사할 적에 아주 후한 인물로 주목받았다고 한다.
"어른도 쓸려가는 판에 쬐끄만 것이 기어나왔단 말여?"
"축구 잘하게 생겼네."

그는 군대를 전역하고 개봉동에서 공구 관련 업체를 운영하다가 망하고 한때 모 기업체 과장 명함을 내밀고 다녔다. 4륜 구동 무쏘를 몰았지만 지방 출장길에 국도변 논바닥으로 전복되어 폐차를 시키고 요즘은 흰색 승합차량을 몰고 다닌다. 차가 논바닥으로 전복되어 밑이 하늘을 향한 상태에서도 운전석 목숨만큼은 멀쩡했단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두 번이나 생과 사의 갈림길을 견학했으니...

1996년도인가? 초등학교 동창생 몇이 모인 자리에 내 고향집 이웃에 살던 여자 동창 지용이가 서른일곱 나이-그앤 아홉살에 학문에 입신하였다-에도 처녀로 있다는 말에 중매를 나서기로 하고, '양현아, 지용이가 아직 처녀라는데 너랑 결혼해뻐리는 게 어떠냐?'는 말을 던졌다. 그러면서 다음 모임엔 승용차로 지용이가 사는 신천리까지 데려다 주라고 귀뜸해주었다. 눈치를 잘 살펴 한적한 곳에 차를 세우고 분위기 띄우는 말로 나가다가 와락 껴안으라고 일렀다.

예정대로 '다음 모임'이 치러졌고, 그 '다음 모임'이 끝난 이튿날, 양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약간 떨리는 음성이었다.
"종호냐?"
"응."
"종호 맞아?"
"응."
"나 말여."
"응."
"엊저녁에 지용이 데려다 주다가 말여."
"응..."
"네가 시킨대로 차 안에서 와락 껴안았거든?"
"응..."
"혹시 오늘 경찰이 오지 않을까?"
"......"
"불안하구나."
"네가 끌어안을 때 지용이가 반항하든?"
"아니..."
"그럼?"
"가만히 있었어."
"그래서 끌어만 안았냐?"
"아니..."
"뽀뽀도 했어?"
"응."
"됐다. 너희들 결혼식 날 축시 한 편 낭송해주마."

두 사람의 스케줄은 일사천리로 짜여졌고, 드디어 내가 결혼식날 사회자 마이크 앞에서 축시 한 편을 낭송해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알고보니 그날 차 안에서 뽀뽀만 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양현이!
충청도 내륙의 은근과 끈기로 코 베어가는 서울바닥에서 의연한 성품으로 사업 잘하길 바란다. 다행히 예전의 상황을 극복하여 지금은 사장 자리에 올라선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도 지방 출장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용이도 잘 지낸다는 소식이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 옛날 물에 쓸리기 전의 양현이만큼 컸다. 그보다 한 두살 적나? 아무튼... 친구 가정의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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