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갑사(甲寺) 입구엔 토담으로 지어진 '꽃 피는 산골' 음식점이 있다.
언뜻 그림 같다. 멀리서 보면 지붕 형태가 버섯처럼 보이기도 하고 남자의 귀두처럼 보이기도 한다. 포근한 느낌 때문에 오가며 들러 몇 번
차(茶)와 음식을 주문했었다.
고향에 전기가 들어온 게 1975년 5월 초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밭고랑 담배들이
무릎쯤 자란 절기였다. 전깃불이 일제히 켜지던 순간의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전기가 들어오고도 동네엔 여전히 구루마가 유일한 운송
수단이었다. 오일장에 나갔다가 오는 구루마엔 비료, 쌀자루, 돼지새끼, 미역꼬지, 소쿠리, 연장이나 똥바가지 같은 것들이 실려 있었고, 혼자
힘으로 걷지 못하는 주정뱅이 영감님이 발딱 누워 늘어진 자세로 잠들어 있곤 했다. 구루마가 다니는 한길엔 소똥이 아무렇게나 갈겨 있었다.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봄이 되기까진 밤에 등잔불을 켜놓고 살았다. 등잔은 석유를 원료로 썼다. 등잔 꼬투리 심지를 적절히
조절하여 콧구멍에 그을음이 묻지 않도록 불을 밝히는 게 지혜였다. 북풍이 문풍지 틈으로 들이닥치는 오밤중엔 문종이로 원통을 만들어 등잔에 씌워
놓기도 했다. 흔들리지 않게 말이다.
손가락을 맞춰 등잔불 그림자로 문짝에다 여우 몸집이나 개의 두상을 만들어 어린 동생을
놀리기도 했다. 사나운 개의 두상을 해놓고 '어흥~' 하면 동생이 '으악~'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럼 또 다같이 함박처럼 웃으며 방 구들 위를
떼굴떼굴 굴렀다.
유리병에 석유를 담아 심지에 불을 밝힌 채 조심스레 들고 야간 학습중인 큰누님 마중을 나간 적도 많았다. 아예
학교 정문까지 가서 기다렸다. 허청의 지게 작대기를 장총처럼 어깨에 메고 누님을 지켰던 거다. 누님은 훗날 월남 전쟁에 간 중위랑 연애편지를
날리며 숨가빠했지만 딴은 내게 참 잘 해주셨다. 박종화 선생님의 <삼국지>를 누님 때문에 읽을 수 있었던 기억...
등잔불 시절엔 멀리 지나가는 마실꾼의 담뱃불이 선명히 보였다. 요즘은 지척의 라이터불도 눈에 띄지 않는다. 동생이랑 등잔불 사이에
두고 벽에 기대어 앉아 무르팍에 책 펴놓고 오래도록 읽던 시절이 그립다. 꾸벅 졸다가 머리 불 닿는 소리에 퍼득 눈 뜨던... 배 고픈
삼경(三更)엔 머리 타는 냄새까지도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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