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망심산

펜과잉크 2005. 9. 17. 11:01

 

망심산!
고향의 산이다. 우리가 다닌 초등학교 옆에 우뚝 솟은 산. 망심산을 한자로 표기하면 어떻게 될까? 望心山이 될까? 초등학교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조립해보면 '望心山'이 틀림없다. 사실이라면 '희망의 산'으로 해석해야 할까?

망심산은 아까 말한대로 초등학교 모교 옆에 있다. 위엄 넘치는 산세는 오후 들어 거대한 산 그림자로 초라한 교사(校舍)를 덥썩 감싸버리곤 했다. 때론 숨 막힐듯 압도적이었다. 그 망심산은 초등학생 걸음으로 한참을 올랐지만 정상으로 소풍 가는 일도 없지 않았다. 호루라기랑 장난감 나팔 불며 선생님 따라... 궤짝을 메고 학동 행렬 따라 정상까지 꾸역꾸역 함께 오르는 상인도 있었다.

1960년대 말 망심산 8부 능선엔 거지 대장이 살고 있었다. 거지 대장만이 아니었다. 소문엔 수십명의 부하 거지들이 산다고 했다. 함적골 마을 뒷편으로 난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 시야가 트이는 정상을 목전에 두면 오늘날 종교적 색채의 기도원을 연상케 하는 허름한 가옥이 나타났다. 거지 대장과 부하들이 사는 집이었다. 허청인지 고(庫)도 있었다.

사람들 중엔 망심산을 우범자 집성촌 내지 산적 소굴쯤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망심산 거주민들이 사람을 해고지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도 나름대로 룰(Rull)과 원칙에 의해 생활하는 것 같았다. 냉엄하고 험상궂으리라 의심하게 되지만 막상 스치면서 보면 순박한 인상들이었다.

 

오일장 거리에서 목격되곤 했던 망심산 거지들은 삼삼오오 다녔으며 축에 무리를 이끄는 중간 보스로 추정되는 덩치가 있었다. 그는 턱수염이 덥수룩했으나 외모와는 달리 온순해보였고 실제로 그가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거나 위력을 과시하고 다니는 걸 보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그들 세계에도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거지 대장이 죽고 부하들도 흩어져 더 이상 망심산은 예전의 붐비는 상황이 아니다. 세월이 좋아진 탓도 있으리라. 거지 대장 후손들은 인근 마을로 분가(分家) 하였는데 장남이 우리 마을 초입으로 이사를 와서 보게 되었을 때의 첫 인상은 대단히 미남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에겐 내 또래의 딸이 있었지만 학력이 전무하여 어울릴 기회가 없었으므로 따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

거지 얘기를 하니 중학교 시절 교실 창밖 부암리 마을의 봄 풍경이 생각난다. 따사로운 중천 햇살을 쐬면서 열기 채 식지 않은 숯가마(窯址*)에 기대어 앉아 몇 명의 거지들이 일제히 이를 잡는 모습이다. 그들의 표정은 봄햇살만큼이나 화사했으며 일면 평화로운 기색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문득 바랑을 메고 반합을 든 채 망심산 오르는 함적골 초입을 바쁘게 움직이던 부하 거지와 부암리 가마터 이 사냥꾼들이 그려진다. 그것은 내 생의 이면에 깊이 자리한 고향의 모습이되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다정한 풍경이기도 하다. 아, 나는 다시 어려져서 호루라기랑 장난감 나팔 불며 선생님 따라 동무들과 망심산으로 소풍 떠날 순 없는가? 그립다.


* 표시 : 窯 - 기와 굽는 가마 요     址 - 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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