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우리 고향의 지명이 '두턱골' 혹은 '두텃골'로 불리워진다.
그러나 백제사(百濟史 :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 운동기) 연구에 관심이 많은 내가 그동안 채집한 자료에
의하면 '두턱골'이나 '두텃골'이 아닌 '둔터골'로 불러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둔터골'의 뜻이 무엇인가? 우선 '둔'자(字)는 '주둔 屯(진칠
둔)' 자(字)이다. 한마디로 백제군이 주둔했던 터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경둔리'를 한문으로 표기하면 '존경할 敬'에 '진칠
屯'이 되는 것이다. 이는 백제군이 진(陣)을 쳤던 매우 중요한 군사지역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자, 좀 더 심도있게 논해보겠다. 우리 마을 윗말 '병목안'의 안쪽 계곡
지명을 '용난골'이라 부른다. 용난골 너머엔 조령리(鳥嶺里)가 있다. '새 鳥' 자(字)에 '재 嶺' 자(字)를 쓴다. '새가 넘는 마을'이란
의미의 이 산간마을 뒷편엔 실제로 '새재고개'가 존재한다. 현재 새재고개 정상엔 1975년도에 김종필 씨가 준공식에 참석하여
서명한 도로비(碑)가 있다. 조령리 이웃은 나령리라는 마을이다. 여기서 나령리는 '羅嶺里'라 표기된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복한 후 그 잔당을 쫓아 격전을 벌인 지역으로 추측된다. 그래 나령리는 자연스럽게 '신라의 경계가 되는 재'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나당 연합군에 밀린 백제의 병사들이 후퇴할 곳은 산세가 험한 조령리와
나령리가 유일시된다. 그쪽은 최근까지도 국내 오지로 불렸던 청양과 맞닿아 있다. 산이 험한 지역은 게릴라 전을 벌이기에 유리하다. 적은 병사로
많은 적을 유린할 수 있는 작전이 게릴라(Ranger) 전술이기 때문이다. 이는 쿠바의 영웅 체 게바라에 관한 <체 게바라
평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 고향 뒷산을 '뒤집엉골'이라 불렀는데 엄격히 말하면 '뒷집안골'이다.
이만복씨 댁 뒷편에 '뒷집 아저씨'라는 노부부가 살았는데 뒷집 안골의 정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그 정상은 이상하게도 평평한 지반으로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이 '뒷집안골' 산봉우리에선 부여 읍내가 멀리 내려다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뒷집안골' 산봉우리는 그 옛날 군사 작전의 일환인 봉화대가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사비(부여)의 정세를 육안으로 포착하여 조령리와 나령리쪽의 아측 진영에 알리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조령리와 나령리에 주둔해 있는 백제 병영에선 뒷집 안골 정상 봉화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가 흥했던 시기의
군사작전이나 멸망 후의 수복운동은 부여-규암-나복리-가중리-둔터골-조령리-나령리-청양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통해 전개됐을 거란 주장이다.
우리 고향 윗말인 '병목안'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고 내려오다가
'사기장골'이란 곳을 지나다 보면 '곱돌공장'이란 언덕이 나왔다. 이곳은 우리 동창 경자네 집 뒷편 지대로 흙 속에서 옛날 것으로 보이는
자기(瓷器) 조각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아이들은 이것을 곱돌이라 부르면서 길바닥에 낙서를 하는 등의 취미 도구로 가지고 놀았다.
이제 와서 그때의 기억을 살려 편자(片瓷)에 나타난 문양이 백제의
연화문(蓮花紋)이니 봉황문(鳳凰紋)이니 따진다는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적어도 오래 전에 인적이 연유해 있었다는 근거는 명백해지는
셈이다.
참고로 나 어릴 적에 사기장골 숲속엔 숯을 굽던 가마터가 있었다. 땅을
원형으로 파 숯을 구워내던 장소로 일제시대나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기장골이 아름드리 노송으로
빽빽했던 점을 감안하면 그 이전까지도 연계가 가능해진다. 석연치 않은 과거의 모습들이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내 고향 '둔터골'을 보면 우선 남향이라는 점을 꼽는다. 뒷편엔
거대한 산세가 버티고 있다. 이 산세는 조령리와 나령리를 거쳐 청양과 예산으로 연결된다. 결국 백제 수복운동의 요새였던 임존성(城)이 예산에
있지 않았던가?
지게를 지고 각대리 뒷산 고개를 넘어 광천장까지 소금을 사러
다녔던 과거의 삶을 감안하면 사비(부여)를 정점으로 한 인근 지역의 백제수복운동은 자연스레 통일된 섹타로 연결이
된다.
사진은 몇 년 전, 애지중지했던 Jeep Rangler로 조령리 뒷산
새재고개를 넘으면서 8부 능선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아들에게 부탁하여 찍었다. 전략적인 개념으로 보면 상당히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음을 가늠케 한다. 왜냐하면 내 뒷편으로 멀리 보이는 들판이 부여쪽이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하면 함양리
앞 들판이다. 한 눈에 훤히 내려다 보이지 않는가? 다만
부여 읍내 동정은 중간의 산세에 막혀 파악이 불가하다. 이런 난제를 '뒷집안골' 정상에 봉화를 피워
해결했을 것으로 풀이된다.
'둔터골'에서 태어난 걸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백제의 유구한 역사, 그 소박한 정기가
숨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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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존성(任存城)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있는 백제의 산성. 사적 제90호. 봉수산(鳳首山)과 그 주위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어 봉수산성이라고도 한다.
둘레가 약 2.5㎞이며 현재 남아 있는 북동쪽 성벽 높이는 4.2m, 서쪽 성벽 높이는 2.6m이고 너비는 1.6m이다. 그밖에
성문·수구문(水口門)·우물터·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이 성은 한산(韓山)의 주류성(周留城)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뒤,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일본에 가 있는 왕자 풍(豊)을 왕으로 받들어 주류성에서 거병하는 한편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임존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복신은 한때 사비성을 포위하기도 했으나 전세가 불리 해져 임존성으로 후퇴해 흑치상지와 힘을
모았다. 그러나 유인궤(劉仁軌) 등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의 공격과 백제부흥군 내부의 분열로 말미암아 여러 성이 차례로 함락되고 최후로 임존성마저
함락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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