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고향 생각

병술년과 너구리

펜과잉크 2006. 1. 1. 12:20

 

여우는 우리나라에서 요사스런 동물로 통합니다. 예를 들어 <傳說의 故鄕> 같은 데에서 요귀(妖鬼)로 묘사되는 동물이지요. 반면 이웃나라 일본에선 너구리가 비슷한 대상으로 통한다고 합니다. 일본의 음식점이나 명소 중엔 너구리상(像)을 세워놓은 곳이 많다고 하더군요. 일본 사람들은 너구리가 단순히 사람을 홀리는 정도를 떠나 복수하는 동물로까지 인식하고 있다고 해요.


어제 전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겨울방학 동안 학당(學堂)에서 한학을 수업할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말입니다. 나이 많은 둘(15세)은 고속버스로 보내고 어린 넷을 제 차에 동승시켜 데려다주었습니다. 궁금해 하실 분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한문 수업을 받을 학생들을 모집하여 여섯명을 엄선(?)한 결과 고향집에 체류시키면서 고향집에서 1.2km쯤 떨어진 윗말(병목안) 대희 어르신댁에 오가며 하루 다섯시간씩 한학을 배우게 되는 과정입니다.


아이들은 저희집 체류 경비로 한달 20만원을 부담하고 학당 수업료로 역시 20만원을 지불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도합 40만원씩의 경비가 드는 셈입니다. 돈 얘기나 나올 때마다 몸이 움추러드는 기분입니다만 현지 사정도 사정이니 어쩔 수 없더군요. 마음이야 한없이 맑고 순수한 아이들을 마음껏 먹이고 재우며 베풀고 싶은 심정이나 인습의 세상이라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한낱 마음으로나 그릴 뿐입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공부라는 게 교과서 과정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외수 님이 장편소설 <들개>에서 외쳤듯이, 우리는 그 옛날 어쩌면 국정교과서에 속아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교과서가 지시하고 강요하는 틀에만 맞춰 살았으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교과서가 지향하는대로 세상이 반드시 일치합니까? 교과서만 믿고 살았다간 언제 코 베일지 모를 험한 세상입니다.


아무튼 전 한 달 동안 고향에 체류하는 아이들이 교과서 지식보다 더 크고 위대한 그 무엇을 배우고 올 거란 확신에 변함이 없습니다. 저희집에서 병목안까지 가고오는 과정도 교육입니다. 오가는 중에 동네어르신과 마주칠 것이고, 앞산과 뒷산, 들판과 개울, 창순네 집과 재식이네 집, 하루 네 번 힘겹게 다녀가는 시내버스, 마을 회관, 개다리, 사기전골, 용난골, 흑염소, 덕구, 산까치, 고라니, 장끼(꿩), 산토끼... 그런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젯밤, 고향집에서 뜻밖의 동물을 만났습니다. 너구리였습니다. 낮에 어머니께서 마을회관에 다녀오시니 마당에 너구리 한 마리가 졸고 있더랍니다. 쫓는 시늉을 해도 듣지 않고 한 곳에 마냥 있더라는 거예요. 어머니께선 허기에 지치거나 몸이 아픈 너구리로 판단하시고 비닐 봉지로 씌워 포획하여 예전에 개(犬) 우리로 썼던 철장(鐵欌)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철장 안엔 개 사료와 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너구리가 기력을 회복하면 다시 놓아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선 '집 안으로 들어온 목숨을 해치면 안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원래 제 아버님 성격이 산 목숨에 대한 해꼬지 같은 걸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 연유로 저 어려서 아이들과 토끼몰이를 다니거나 새집 터는 일행들과 어울렸다가 꾸지람을 들은 사례가 몇 번 있었지요.


시골 어른들은 육간(肉間, 精肉店)을 경영하는 사람들도 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축을 도살하고 살을 도려내는 직업이 결코 떳떳하지 못한 짓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지요. 사진은 몇 년 전에 풍산견이 있던 고향집 철장을 찍은 것입니다. 기력을 잃은 너구리 모습이 보입니다.


부디 너구리가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빠' 혹은 '엄마'일지 모를 저 너구리를 가족들이 얼마나 그리워 할까요?


 

* 고향집 너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