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터골!
흔히 '두턱골'이라 부르는 고향의 고유 지명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두턱골'은 '둔터골'의 오기(誤記)입니다. '둔터골'로 불러야 맞습니다. '둔터골'은 말 그대로 '백제군의 진영이 있던 터' 혹은 '백제군이 주둔했던 터'로 해석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진칠 둔(屯)'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경둔리(敬屯里)...
고향 둔터골엔 각 처소(處所) 별로 고유 지명이 따로 있습니다. '옹기점(店)골'이란 옹기를 파는 집이 있는 고을이란 뜻입니다. '사기점골' 역시 '사기점(店)골'이 되는 셈입니다. 여기서 '점(店)' 자(字)는 대략 '집 점'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엄격히 풀이하면 '가게 점(店)' 자(字)입니다. 그러니까 '사기점골'에도 사기를 구워 파는 도요점(陶窯店)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어린 날을 기억하는 분들은 경자네 집 왼편 언덕 참나무 군락 소로 주변에 사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던 걸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 그걸 주워 길바닥에 낙서를 하면 아주 잘 써졌지요. '곱돌'이라고 부르던 조각들 말입니다.
또한 병목안 저수지 위 기청이네 외딴집에서 합수리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는데요. 이 길의 중간에 작은 능선이 하나 있습니다. 그쪽 지명이 '양마장'입니다. '양마장(養馬場)'이란 그대로 '말을 기르던 장소'를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십리바위'라 했던 암석군(岩石群)은 과거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뜻의 '선유암(仙遊岩)'이 변형된 지명입니다. 그 아래쪽에 '마루바위'가 있지요. 지금도 위용을 뽐내며 떠억 버티고 있습니다.
또 하나, 기영이네 외딴집에서 '검산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개젖고개' 또는 '계족고개'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가재고개'의 오기(誤記)입니다. 옛날에 도보로 교통수단을 대신하던 시절에 이 고개를 넘어 대양리쪽 친척이나 지인과 만났다고 하는데요. 당시 검산골 골짜기에 가재가 아주 많이 서식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 어렸을 적에 용난골 도랑에서 가재를 잡던 기억이 선연합니다. 그런 점으로 검산골은 골짜기가 깊고 음지인 점으로 찬물에서 서식하는 가재가 왕성했을 거란 추측이 입니다. 그래서 그 고개가 '가재고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임의로 지은 게 아니고, 현재까지 병목안 주민들 사이에 불려지는 지명임을 참조하십시오.
기영이네 집에서 마을쪽으로 나오려면 조그만 개천을 하나 건너야 하는데요. 이 개천 징검다리 아래편 밭이 백제군의 병기(兵器)를 제작하던 철장간(대장간) 터입니다. 우리 어렸을 적에 이 밭에선 철(鐵)을 사용한 불순물(찌꺼기) 같은 것들이 출토되곤 했지요.
마지막으로 용난골에서 대양리 뒷산으로 통하는 소로가 있는데 이 소로가 능선과 닿는 지명이 '말뒹굴이'입니다. 옛날에 말이 뒹굴어 죽었다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곳엔 지금도 말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봉분이 있습니다. 말이 부(富)와 권위의 척도로 인식되던 시절, 가파른 산을 오르던 말이 뒹굴어 죽었으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아마도 '말뒹굴이' 역시 백제군의 활동 루트과 관련이 있으리라 봅니다.
지난번 말씀드린 중뜸 뒷산 '뒷집안골'은 뒷집 아저씨라는 분의
가옥('草家') 뒷편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기원네 산으로 가는 골짜기 일대를 통털어 부르는 지명이었구요. 고봉(高峰)을 '뒤집엉골'이라 부르지
않고 '투구(a
결과적으로 제 고향의 고유 지명은 백제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용난골'이란 지명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가상합니까? 용난골 안쪽에 진(陣)을 치면 가재고개쪽 외엔 일체 공개되지 않는 천혜의 요새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용난골'을 통해 각대리 양현네 집과 우열네 집으로 가게 되지요. 이 '용난골'은 막상 현지에 가서 보면 상당히 넓은 밭과 식수용 천(泉)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곳을 중간 기지로 백제군이 대양리와 조령리, 나령리로 이어지는 루트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희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던 이창섭 선생님이 초임 시절 대양초등학교에 재직하실 땐 새벽에 용난골 쪽 산길을 통하여 대양초등학교까지 통근하셨다고 합니다. 저희 동창 이경구 부친 이충훈 선생님도 대양초등학교 재직 중 가재고개를 넘어 검산골 산길을 통해 도보로 통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가끔 해장에 달구지로 퇴비를 실어 논에 내다부리고 출근을 하여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지요. 보통 심성으론 새벽에 일어나 병목안부터 수렁들 논까지 달구지로 퇴비를 실어나르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 분의 부친, 그러니까 경구 조부님이 무척 엄하셨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아마도 그러한 가르침의 영향이 아닐까 유추됩니다.
현재 경자네 고향집이 경구 조부님께서 기거하시던 고택(古宅)인데요. 더러 병호 형님네 집 앞 호도나무 아래에 서서 수렁들을 향해 '재중아~' 하며 호명하는 소리가 굉장했습니다. 한 두 번 불러 대답이 없으면 톤이 점점 올라갔지요. 그래 나중엔 결국 '재중아~~~' 부르는 소리가 온 산을 울리도록 컸습니다. 종내 '예~' 하고 대답을 하면, '아, 이놈아. 대답 좀 빨리 혀. 이놈아'하시며 들판에 대고 막 역정을 내셨습니다.
그 '재중이'이란 분은 경구 조부님의 소실(妾) 할머니가 데리고 온 자식으로 경구네 혈육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모친 따라 남의 집에 와서 고생께나 했지요. 오늘날 크게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재중이란 분의 누님 분 성함이 '임재분'이란 분이셨는데 몹쓸 병에 걸려 수 년 전에 단명했다고 들었습니다.
제 글이 지루한가요? 하지만 고향의 흙 한 줌이라도 소중한 사람에겐 고향에 대한 연구 자체가 큰 보람입니다.
사실 교통수단이 마땅찮던 시절의 오지 삶이란 주로 산간 지름길을 통한 보행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진단을 낳게 합니다. 실제로 어른들의 구술(口述)을 채록하다 보면 놀라운 점이 하나 둘 아닙니다.
지게를 지고 용난골을 올라 각대리를
경유하여 외산쪽 고개를 넘어 광천까지 가서 새우젓과 소금을 사서 지고 왔다는 부분들이 그렇습니다. 병목안 기청이
조부님도 젊어 화산 금광에서 일하실 적에 매일 가재고개를 넘어 검산골로 하여 차중리를 경유한 뒤 장벌리 쪽으로 걸어
다니셨다고 합니다. 고된 삶 탓인지 그 분은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단명하셨어요. 그 후손이 제 숙부 류성희(柳成熙) 님이신데
오늘날 막대한 지주(地主)가 되셨습니다. 아마 과거의 설움들이 삶의 의욕을 다지는 데 기여했을 줄
믿습니다.
잠시 화두가 다른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전자에 언급한 '용난골'엔 상수도 저수고(貯水庫)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맨 아랫마을 '골안터' 복순이네 집과 종오네 집까지 수도관이 매설되었지요. 제 고향에 상수도가 설치된 게 1971년으로 기억됩니다. 수도 시설은 각 가정에 획기적인 변모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당시 도(道) 내에서 획기적인 마을로 주목을 받았지요. 물발이 어찌나 센지 '팍팍' 튀는 느낌이었습니다.
상수도에 의존하고 살 땐 용난골에 흑염소 한 마리 묶지 못했습니다. 소를 매어놓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골짜기 물이 저수탱크로 유입된 후 곧바로 수도관을 통해 각 가정에 급수(給水)되었으니까요. 물론 가끔 수도꼭지에서 가재가 찢겨져 튀어나오는 예도 없진 않았습니다. 그 저수탱크는 관리자가 정해져 있어 오직 당사자만이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소독약을 풀 때에도 관리자만이 가능했지요.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정서가 왜곡되어 있는 사람이 소독약 대신 농약을 풀었다면 온 마을 주민들이 끔찍한 변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상수도 시설은 상당히 오랫동안 마을의 식수로서 그 역할을 다 했습니다. 용난골 계곡부터 골안터 복순이네 집까지 송수관이 연결되어 사철 풍족한 물 공급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정부의 지원으로 마을 모처에 별도의 저수탱크를 설치하여 지하 수 백미터 암반수를 끌어올려 저수(貯水)한 후 각 가정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고향의 고유 지명을 통해 역사적 가치를 진단하겠다는 애초의 의도와는 빗나간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만 제 고향의 각 처(處) 지명은 이처럼 백제의 얼과 혼이 서려있는 곳이 많습니다. 문득 그 옛날 백제의 병사들이 고향의 푸른 산천을 누비는 모습들이 그려집니다.
백제의 혼(魂)이여,
부활을 앙망(仰望)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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