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시절, 동절기 4주간 GOP에서 현지 초병(哨兵)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본 장면이다. 폭설을 헤치고 멧돼지 가족이 내려와 식당 근처 잔밥통에서 음식물 찌꺼기를 헤쳐먹는 모습이었다. 그 추운 꽝꽝 겨울에 잔밥통을 넘어뜨리고 얼어붙은 음식물을 먹어치우는 모습에서 가공할 식성이 느껴졌다. 한 바탕 만찬을 즐긴 멧돼지들은 오던 길로 사라지곤 했는데 한결같이 일렬 종대로 이동했다. 즉 선두의 어미가 눈밭에 길을 내면 새끼들이 나란히 뒤따르는 것이었다.
엽사(獵師)들이 산에서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 멧돼지라고 한다. 물론 맹수가 사는 나라에서야 말이 달라지겠지만, 언젠가 TV 인터뷰에 나온 '한국의 사냥꾼' 말에 의하면 멧돼지는 성격이 과격하고 돌발적이라서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었다. 다른 맹수는 -그는 호랑이를 예로 들었다- 사람을 보면 일단 경계하고 피하는 게 상례인데 멧돼지는 전혀 다르다고 했다. 인간의 출현을 개의치 않거나 오히려 '돌격 앞으로' 해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기자가 '총으로 쏘면 되지 않나요?' 물으니 반색을 지으며 멧돼지에게 총질은 재앙을 부르는 바보짓이라는 대답이었다. 한국에서 허가된 엽총으로는 멧돼지를 제압하기는 커녕 오히려 흥분만 자극시킨다는 주장이었다.
서울에 또 다시 멧돼지가 출현했다. 사람들에 쫓겨 한강으로 뛰어든 멧돼지는 강을 도강하는데 불과 5분 남짓 밖에 안 걸렸단다. 하지만 이 돼지는 맞은편에서 기다리는 엽사와 일곱마리의 사냥개와 마주쳐야 했다. 체력이 소모된 멧돼지로선 개떼의 집단 공격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멧돼지는 엽사가 찌른 칼에 심장이 찔려 죽고 말았다. 영훈중학교 운동장에 나타난 멧돼지 -친구가 재직중인 학교라 정확히 기억함-와 강남에 나타난 멧돼지처럼 인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TV를 보면서 슬픈 생각이 들었다. 왜 멧돼지는 서울 도심에 나타날 때마다 죽어야 하는가? 멧돼지 출현을 신고 받고 출동한 119 소방대원들의 원시적인 포획 방법은 차라리 박수동의 <고인돌>에 나오는 돌망치 엽사를 데려오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짐승을 유니폼 차림의 소방대원들이 떼지어 몽둥이나 꼬챙이로 무장하고 달려든다. 종로 거리에 나타났던 HID 예비역들이나 자유공원 데모꾼들처럼 아무렇게나 몰려다니며 두들겨패고 찔러대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죽은 멧돼지 앞에 소방대원이 서서 개선장군 목소리로 '마취제 한 발로는 듣지 않아 세 발을 쐈는데 그만 쇼크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면서 공(功)을 자찬하는 발언으로 쇼를 마친다.
행인이 부상당한 부분에서도 사회자는 '멧돼지가 물었다'는 표현을 썼고, 목격자는 '멧돼지가 치고 나갔다'고 했다. 사실 멧돼지가 '물었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대개의 초식동물은 살상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물론 멧돼지가 육식을 겸하는 장면이 네셔날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프로그램에 보도된 적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내 말은 멧돼지가 치고 나갔다는 목격자의 말에 설득력이 있다. 멧돼지의 송곳니를 보라. 걸리면 최소한 절창(絶創)이다. 더구나 멧돼지의 핵무기가 '주둥이' 아닌가? 어지간한 나무 밑둥은 주둥이만으로 무너뜨린다. 그 앞에 인간은 상대가 안되는 것이다.
다시 군 시절로 돌아가서, 미시령 초입 창바위골에서 멧돼지 가족을 만난 적이 있는데 새끼들이 눈 깜짝할 새 흩어져 수풀 속으로 사라진 상태에서 어미 홀로 의연히 버티고 우리 쪽을 노려보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수풀 사이로 흩어진 새끼들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찍' 소리 하나 없었다. 이런 영리함은 까투리 새끼들도 마찬가지다. 꿩의 병아리가 수풀 틈새를 요리조리 피해 뛰는 속도감은 정말 대단하다.
멧돼지의 심장을 칼로 찌른 엽사... '스승 師' 자(字)인 걸 보니 사냥꾼을 존대하는 말 같은데 기진맥진한 멧돼지 심장이나 찌르는 꼴이 참 한심하다. 이 땅 어디에 사냥개 일곱마리씩 풀어놓을 사냥터가 있는가? 도심에 나타난 멧돼지보다 엽사와 개떼들(인간 세상의 머저리들)에게 탄식을 보내는 바이다.
* 사진 : 대간첩작전(?)에서 승리한 인간 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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