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을 쓰다가 언급한 강원도 지명이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3리 삼거리에서 미시령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1Km 가량 진행하다가 왼쪽을 보면 계곡 초입 수풀 사이에 우뚝 선 작은 암석군(岩石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암석군을 가만히 보면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 현지 주민들은 그 바위를 창(窓)바위라 부른다.
도로와 창바위 사이엔 미시령에서 발원한 개울이 가로지른다. 폭우가 쏟아지면 이 개울은 성난 강으로 변한다. 개울가 골짜기 왼편 목조물이 인근 특수부대 요원들의 전용 '특공사격장'이다. K1-A 기관총으로 무장한 요원들이 오른손에 총을 쥔 채 공중낙법으로 몸을 날려 지상에 착지하는 동시에 타켓을 향해 총알 세례를 가하는 훈련을 숙달했던 그 장소다. 그래 이 사격장과 창바위 사이로 난 골짜기를 창바위골이라 하는 것이다.
초입에서 보는 골짜기는 얼핏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막상 안으로 들어서면 고개(嶺)까지 가는데 두 시간 가까이 걸린다. 인적 하나 없는 산중, 울창한 수림으로 감춰진 실개천을 따라 사람 하나 겨우 다닐 소로가 끝없이 뻗어 있다. 더러 물길에 끊어지곤 하는 길은 정상으로 향하면서 흐려짐이 더 하지만 영를 넘으면 다시 내리막으로 그 미로가 교묘히 이어진다.
근데 영을 넘어 몇 발짝 가다 보면 길 양편에 난데없이 '天下大將軍'과 '地下女將軍' 장승이 떠억 버티고 있는 상황과 마주친다.
"어메, 저 씨발것이 뭣여?"
전라도 출신의 전우 사투리로나 가능할 탄식의 이 장승은 아무도 없는 산중 수림 사이에서 이쪽을 향해 네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첩첩산중에 장승이라니... 식지 않는 의문을 참고 조금만 더 길을 가면 느닷없이 분지가 나오면서 집 한 채가 이방인을 반긴다. 용대3리 부락에서 산속으로 20리 가량 떨어진 완전 오지인 셈이다. 이 집엔 어지간한 살림살이를 갖추고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된 'ㄱ'자(字) 형태를 띠고 있다. 안채엔 당시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촌로가 기거했고 사랑채엔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 살았다. 두 사람은 남남이나 청년의 눈빛이 예사가 아니었음을 기억한다. 사랑채가 각종 서적들로 가득했다.
청년의 신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운동권 핵심 인물이 잠입하여 기거하는 집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하긴 아무리 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시국이라 할지라도 군인들은 정권이 지향하는 바와는 별도로 군인 고유의 행동권역에서 자유로운 처신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설령 그가 현상금 걸린 수배자라 해도 군인들에겐 한낱 무덤덤한 인물일 뿐이었다. 수배자는 경찰에게나 필요한 대상이다. 서울 종로의 시위대가 전두환 화형식을 거행한들 강원도의 군인들이 알 게 뭐냐? 군인들은 '조국과 민족'만 잘 지키면 되는 것이다.
지금 밖엔 비가 내린다. 가을비다. 창바위골에도 비가 내릴까? 문득 산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던 설악의 붉은 단풍이 생각난다. 그 단풍에 넋을 잃고 수채화 풍경들을 가슴에 담던 추억들이 먼 기억의 강을 건너 끝없이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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