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것들...
한때 '크로바'니 '마라톤'이니 하는 타자기들이 유명했지만 지금은 타자기 자체를 볼 수가 없다. 특히 수동 타자기는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간간히 눈에 띠는 게 있어도 2벌식 전동 타자기일 뿐이다. 사실 타자체 활자의 전형은 4벌식 수동 타자기이다. 한참 바쁜 사무실에서 들려오던 타자기 소리가 생각난다.
어제 동대문운동장 도깨비 시장에 갔다가 타자기 파는 곳을 보았다. 순간 묘한 흥분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타자기를 꺼내 두들겨 봤다. 멀쩡했다. 그 자리에서 타자기를 구입했다. 집으로 오는 동안 얼마나 기분 충만했는지 모른다.
* 동대문운동장 도깨비시장의 타자기 매장
참고로 동대문운동장 도깨비시장의 타자기 매장은 다른 잡화에 섞여 한쪽 구석에 진열되어 있으므로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정문으로 들어가 오른쪽 통로 끝 부분 매장이다.
* 동대문운동장 도깨비시장에서 구입한 4벌식 수동 타자기 'clover 813'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딘가에 있을 타자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 옛날 사무실에서 사용하다가 처박아둔 타자기가 분명 있을 것이었다. 한때 나의 업무를 열렬히 대신해주던 4벌식 '크로바' 수동 타자기...
창고 책 무더기 속에 '크로바' 4벌식 수동 타자기가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었다. 찾아내는 순간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모른다. 기능을 테스크 해보니 전혀 이상 없다. 다만 리본의 잉크가 말랐을 뿐! 나는 타자기의 먼지를 털어내고 이곳 저곳에 윤활유를 칠해주었다. 그러자 옛날의 기능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이었다.
오늘 인터넷을 뒤져 타자기 리본(먹끈)을 파는 곳을 찾아냈다. 사무기기 전문 쇼핑몰 한 군데에서 수동 타자기 리본을 파는 것이었다. 그곳에 전화를 걸으니 다행히 받는 이가 있었다. 일요일임에도 중요 회의 때문에 출근했다는 대답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즉시 전철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리하여 수동 타자기 리본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오늘 구입한 수동 타자기 잉크 리본
집으로 와서 타자기에 설치하고 타닥타닥 쳐보니 글씨가 선명히 찍혀 나왔다. 으하하하...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타자기를 칠 수 있다니 얼마나 신선한가? 자세를 바로 잡고 제대로 시도를 해봤다. 오랜만에 쳐보는 타자기라 오타가 잦았다. 하지만 마음을 밝게 해주는 타자기 소리는 과거와 하나 다르지 않았다.
* 창고를 뒤져 찾아낸 4벌식 수동 타자기 'clover 810'
A4 크기 용지를 타자기에 끼워넣고 '내지리 시내버스 승객 여러분'이라고 찍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작성해 나갔다. 운지가 낯설은 탓에 오타 투성이었지만 설레이는 마음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 내지리 시내버스 승객 여러분께 드리는 글 - 사진을 클릭하면 화면이 원래 크기로 확대됨
당분간 타자기로 원고를 작성하리라. 엽서를 끼워 넣고 먼 고향의 친구에게 안부 편지부터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