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우편 시절이 떠오른다. 그리운 이들에게 띄워 보냈던 병영의 편지…. 숱한 사연들을 편지지에 깨알처럼 적어 봉(封)한 후 행정반
우편함에 넣으면 행정병이 수거하여 대대(大隊)로 가지고 갔다. 거기서 편지는 1차 보안검열을 받았다. 나는 편지를 많이 보내기로 알려져 수시로
검열 대상이 되었다. 나중에 휴가를 나와 어머니께서 모아놓은 편지를 보니 여러 군데에서 매직으로 그어놓은 검열흔이 발견되었다.
고향집 어머니께 스물 일곱 통의 편지를 쓴 적도 있다. 훗날 '밭에서 돌아오니 마당이 온통 하얗더라' 하신 어머니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우체부가 울 밖에서 던진 스물 일곱 통의 편지였던 것이다. 봉투 덮개 부분에 일일이 번호를 적은 기억이 난다.
미시령 계곡 '즉각조치 사격훈련장'에선 종이가 없어 휴식시간에 그늘에 앉아 방탄모 위에 담배갑을 펼쳐놓고 편지를 썼다.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부모형제와 친구들….
'걱정 마세요. 저는 건강히 잘 있답니다.'
내게서 떠난 군사우편은 일주일 혹은 열흘 후 답장이 되어 돌아왔다. 군대에서 편지를 받을 때처럼 설레는 일이 또 있었던가? 내가 보낸 수 십 통엔 어림없었지만 그래도 간간이 오는 편지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메마른 가슴을 적셨다.
한 번은 산간오지에서 2주 일정의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할 때였다. 강원도 고성 근교 산기슭 저수지 둑에 숙영지를 구축하고 텐트에서 자고 일어나니 둑 아래에 부식 추진 차량이 와 있었다. 운전병은 그동안 부대에 도착한 우편물까지 두툼히 들고 왔다. 그는 차에서 내려 한 명 한 명 호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만큼 내 이름 '류종호'가 가슴에 절실하게 와 닿은 적이 없었다.
진보라 스탬프로 '군사우편'이라 꾸욱 찍어 보냈던 사연들…. 강원도의 산과 구릉들을 헤치고 그리운 이들에게 내 존재를 확인시켜준 유일한 몸짓이었다. 김신의 <大學別曲>과 이향아 장편 <꺼이꺼이 울며 어디로 가는가>, 이외수의 <칼>, <들개>, <장수하늘소>. 혼란스럽고 의아했던 까뮈의 지론과 로트레아몽의 시어(詩語)들…. 오혜령, 천경자 수필집…. 김주영, 송기숙, 박완서…. 그런 이름들에 지배받던 시절이었다.
지금 내 나이 마흔 여섯. 책 한 권 들고 계절의 숲 속으로 사라져 긴 독서의 시간에 몰입하고 싶다. 그리고 먼 옛날의 '군사우편' 편지지를 채우던 애달픔으로 짧은 엽서라도 한 장 쓰고 싶다. 오늘 내 마음 속의 그리운 이름들을 헤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