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
난 별 볼 일 없는 몸으로
-공부 잘하는 몸도, 운동 잘하는 몸도, 부잣집 몸도 아니었다-
단지 말 잘 듣고 건강한 충청도 출신이란 이유로
'대한민국 제703특공대'로 차출되어 가서
참 여러 고비 넘겨 가면서 그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특공대로 차출될 당시
입대 동기가 여섯명이었는데
그 중 세명이 고향 부여 출신으로 조성욱, 이상열이란 이름이었다.
성욱이는 아버님이 대한체육회 간부로 재직중이셨고,
매형이 육군 모 부대장이어서 중대 행정병으로 편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난 160 주특기로 매 훈련에 참가하였고,
이상열 또한 똑같이 훈련에 참여하였다.
우리 셋은 특공대에 가서도
같은 2대대 6중대로 편성되어 미시령 입구 막사에서 함께 생활했다.
우연치고는 특이한 경우였다.
상열이는 고향 출신이란 점 말고도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라 무척 가까이 지냈다.
그는 학창시절 축구를 잘하여
교내 체육대회 같은 시합이 있을 경우엔 언제나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군 생활은 좀 달랐다.
운동장을 누비고 다니던 그가 훈련엔 무척 소극적이었다.
매사 겁 먹은 눈빛이었고,
두려움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결국 그는
훈련중 다리를 심하게 다쳐 원주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3개월 가량 지났을 때 복귀하였으나
무슨 훈련인가에 나갔다가 두번째로 다리가 부러져 아예 다른 부대로 전출이 나버렸다.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겨웠던지라
고향의 전우가 떠나는 길도 배웅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영영 우리는 소식을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가끔 군 생활을 떠올릴 때마다
내 뇌리엔 상열이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 증폭되었다.
'어디에 살까?'
오늘,
출근 직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직원이 바꿔줘서 받았더니
대뜸
'종호야, 나 이상열이야.'
한다.
난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뜸을 들이며
'이상열이라니요?'
했다.
다시 그가
'나 상열이야. 옛날에 703특공대 같이 갔던 이상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으악!'
소리를 질렀다.
'내 전우 이상열? 이게 얼마만인가? 응? 정말 이상열이야?'
'응.'
그는 목이 메이는 어투였다.
'종호, 난 자네가 거기서 죽은 줄 알았어. 그런데 어제 TV를 보다가 자네가 나오는 걸 봤어. 시인 됐다면서? 동작동 국립묘지 가는 것도 보고, 다 봤어...'
아마 녹화 방송을 시청한 것 같았다.
방영된지 제법 지난 프로그램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어디 살아?'
내가 물었다.
'나 인천 살아. 부평 산곡동 현대아파트...'
'......'
난 잠시 말을 잃었다.
부평 산곡동이면 내 집이 있는 주안에서 10분 남짓 걸리는 거리 밖엔 안되는 곳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꼭 만날 것을 약속했다.
고향 출신이자 고등학교 동창으로 이 나라의 특공대원이 되어 산악을 누비던 시절,
부상을 당해 의기소침해 있던 그의 모습이 뇌리에 또렷이 펼쳐진다.
잠시 후,
서울의 성욱이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성욱이는 탄식을 연발하며
'그래.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곧 너희들이 만나겠구나. 나도 만나자.'
한다.
상열이가 다리를 절뚝이며 전출을 떠난 게 1984년 4월경이던가?
당시 난 훈련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그를 원망도 했었다.
그러나 어쨌든
24년 세월이 흘러 우린 다시 만났다.
만나면 어떤 대화가 오갈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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