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입니다. 방학 과제로 대한민국 지도를 그려오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전도를 그린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아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 마침 아랫집 사는 같은 학년 여학생을 만났는데 자신은 오빠가 그려줄 거라며 자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중학생 오빠가 있었거든요. 저는 아이가 지도를 그릴 때 내 것까지 함께 그려 달라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아이도 좋다 하더군요. 지도를 그리는 날, 크레용과 도화지를 들고 아랫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오빠, 그러니까 중학생 선배가 동생 지도 그리기에만 몰두할 뿐 제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습니다. 이따금씩 제 크레용을 갖다 쓰면서 얼른 끝내는 대로 그려준다 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반나절이 흐르도록 제 차례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 오전에 다시 오라더군요. 하지만 이튿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배는 오직 동생 지도 그리기에만 정신 팔려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전도가 완성되어 가면서 아랫집 아이는 신이 난 눈치였습니다. 저는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이틀간 기다린 보람도 헛되이 크레용과 도화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으앙…. 나쁜 새끼!” 집에 도착한 저는 제가 직접 대한민국 지도를 그리기로 했습니다. 그까짓 거, 더 이상 누구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어요. 왠지 오기가 일더군요. 그래 누나의 지도책을 펼쳐놓고 아랫집 선배가 그린 지도를 떠올리며 연필로 열심히 본을 떴지요.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그리고, 연신 지우고 또 그려나갔습니다. 그런 후 각 도별 경계와 서울, 평양, 부산을 표시한 다음 산맥을 그려 크레용으로 칠했습니다. 열심히 칠했습니다. 그림은 며칠간 계속 됐습니다. 드디어 지도가 완성되었을 때 저는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 과제물 전시가 있었을 때 제 그림이 뽑혀 걸렸지요. 학예판에 두 달 가까이 게시되었을 겁니다. 일이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랫집 아이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한 번은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침내 하교 길에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어느날, 집으로 가다가 다리 밑에서 송사리를 잡는데 아랫집 아이가 지나가며 슬슬 놀리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오빠를 믿는지 평소 거만한 데가 있었어요. 저는 형이 없는 맏이라서 믿을 빽이 좆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최고로 막강한 부모님 빽이 있었지요. 특히 어머니는 제 일이라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두려울 게 없던 저는 아이 머리채를 휘어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아이가 울부짖으며 달려들더군요. 저는 화가 나서 책보를 빼앗아 논에다 던져버렸습니다.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아랫집 아주머니가 쫓아오셨습니다. 급기야 어른들 싸움으로 번진 겁니다. 저는 어머니께 지난번 여름방학 때의 일을 고자질 했습니다. “지도를 그려주겠다고 말만 하고요. 제 크레용을 골라 쓰면서 그 년 것만 그려 주었어요. 그리고요. 오늘도 그년이 먼저 놀렸습니다.” “그래도 담부터는 책보를 물에 던지지 마라.” 오늘 사무실에서 최근판 대한민국 전도를 보다가 북한 지역에 의외로 섬이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황해도 앞 바다뿐 아니라 평양과 신의주 사이에도 큰 섬이 있더군요. 예전엔 그런 게 없었거든요. 아무튼 지금 다시 초등학교 3학년으로 돌아가 대한민국 전도를 그리라면 서해의 섬 몇 개를 더 추가해야 될 것 같습니다. 참, 아랫집 그 아이도 시집가서 아들 하나 낳고 잘 살아요. 동창들 사이에선 예쁘기로 소문났었지요. 제가 볼 땐 심술 맞은 인상일 뿐인데 사람 눈과 속은 각기 다른가 봐요. 속타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