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수필을 ‘주변문학’이라 한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지론을 함축하여 수필을 ‘붓 가는대로 쓰는 글’로 보자면 자칫 오해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나 이와 관련된 수필가들의 주장이 분분한 건 사실이다. 본래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의 뜻이 다른 데에 있다면서 괴이한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다. 나라면 수필은 그냥 ‘소재와 제재가 자유로운 비전문가의 글’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수필은 광범위하고 특별한 지적능력이나 형식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 하여 마구잡이로 쓰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무형식의 형식'에 맞게 적절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형식도 균형과 길이의 안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본문의 취지가 다른 데에 있으므로 이만 줄이고 하려했던 화두로 돌리자면, 수필이 ‘주변문학’ 소리를 피하지 못하는 이유 중엔 수필가들의 자성이 요구되는 몇 가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수필은 ‘주변문학’을 넘어 ‘어물쩌엉문학’이다. ‘어물쩡’보다도 더 늘어진다. 신춘문예에 수필이 빠졌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정작 수필문단 관계자들이 수필 위상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얼른 답이 나오지 않는다. 평소 문단의 중심에 서려 노력한 공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자신의 몫은 별 것도 없으면서 결실만 바란다면 베짱이 심보와 무엇이 다른가. 인천문협을 보더라도 그렇다. 무슨 행사를 하면 수필가들의 참여율이 저조하다. 제일 많은 군단을 거느린 분과에서 빈약할 정도의 인원만 참여한다. 그것도 삼삼오오 소수 개체로 쪼개져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들처럼 잠시라도 격식을 망라하여 두루 어울릴 줄을 모른다. 해 저물어 안방에 들여놓을 요강단지 빼먹고 온 사람처럼 어딘가 좌불안석이다. 무게를 지키는 중견도 보인다. 사춤에 쇠 덩어리 두 어근 매달고 온 사람 같은 이도 있다. 아예 무게감을 초월한다. 그렇게 있다 슬그머니 사라져 종적을 감춘다. 특별한 발언을 남기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은 자꾸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다. 수필 쓰는 사람들에게 던진다. 진정 문학의 중심에 서고 싶다면 평소부터 중심 역할을 하라. 만날 주변에서 '어물쩌엉'거리며 대우가 시원찮다 원망만 하지 말고 말이다. 마땅히 해야 할 도리와 책임은 회피하면서 권리만 찾으려 든다면 지나친 욕심 아닐까? 문인협회 행사에도 적극 참여하라. 막상 나오면 이 분 저 분과 두루 인사 좀 나누고…. 앉아 무게만 잡는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공식적인 행사에선 공식적인 제스처가 어울린다. 그런 자리에 와서까지 남동수필, 서구수필, 중구수필, 연수수필, 제물포수필로 나눠 앉으면 보기 좋을 것 같나? 천만에! 자꾸 나더러 문제의식 있다고 하지 말고, 문제 많은 ‘사이비양반’들의 사고부터 뜯어 고쳤으면 한다. 새해엔 수필 문단의 핵심적 부상을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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