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이 생각 저 생각

눈깔소녀 선배님

펜과잉크 2005. 7. 27. 01:24

 

선배님,

꼬리글로 대신하기엔 가슴에 담은 것들이 많아 따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선배님은 지금 김해에 사시지요? 몇 년 전에 김해 사는 분이 색소폰 빈티지 모델을 내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 타고 김해공항까지 날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공항 대합실 창문으로 바라보는 김해쪽 석양이 인상적이었어요. 주저없이 카메라를 꺼내 찍어 지금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져 있답니다.

 

그 후 다시 김해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제대학교 앞 산간도로를 지나 좌측 급경사 오르막을 오르자 늪지를 연상케하는 분지가 나오더군요. 이를테면 인제대학교 뒷산이었습니다. 산 정상에 천문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더 걸어 오르다가 민가 있는 중간에 서 있다가 내려왔습니다. 그날을 회상하며 지은 졸작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대와 나 천문대 아래 언덕에 서서 석양 노을 바라보며 발 밑의 풀꽃

    이야기를 주고 받던 그날의 속삭임도 추억

                                                                                        <추억> 全文

 

 

선배님,

선배님이 알고 계시는 경둔리는 1리, 2리, 3리로 나뉩니다. 1리는 상둔리 혹은 둔터골이라 부르지요. 2리는 비지재라고 합니다. 선배님이 기억하시는 정수터는 바로 3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정수터라는 고유 지명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머지않은 곳에 가로고개가 있지요. 가로고개는 과거 흉흉한 소문들이 나돌던 곳입니다.

 

정수터엔 '할아버지' 별명의 1년 선배가 살았는데 순간 이름을 까먹었습니다. 저희 동네 박병재 선배가 그 선배한테 시집을 갔지요. 그러니까 1리에서 3리로 시집을 간 셈입니다. 두 분이 초등학교 동창인 걸로 압니다. 눈깔소녀 선배님도 두 분을 기억하시지요?

 

앞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가로고개는 내지리 주민들에게 좋지 않은 소문으로 인식되는 산길입니다. 인적 끊긴 밤중에 걷노라면 등골이 오싹거릴 것만 같아요. 수목리 과수원집 딸 애가 그 길을 걸어 내지리 송 목사의 교회에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오밤중 산길도 끄떡없나 봐요.

 

내지리는 제 친구였던 망자(亡者) 한명규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 친구가 고향집 뒷산에서 목을 매기 전만 해도 성남의 여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생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친구였는데 아쉽게 되어버렸어요. 죽음 앞에서 보면 누구나 한 발짝씩 죽어온다는데 스스로 단명(斷命)해버리는 처사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내지리는 1972년 대수해 때 동네 반토막이 물에 쓸리거나 잠긴 아픔이 있습니다. 선배님이 5학년이고 제가 4학년 때입니다. 그래도 내대리는 지대가 높아 내지리보다 피해가 적었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뒷산 가파른 산세에서 몇 군데 사태가 졌던 걸로 압니다. 내대리 사는 권영돈, 상희복, 송민희 같은 아이들이 생각나는군요.

 

신동 망해쪽 사는 윤용숙이란 여자아이도 생각납니다. 그 앤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는데 이상하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더군요. 용숙이 어머님이 멋쟁이였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면 한복으로 말끔히 단장하고 나비처럼 사뿐사뿐 다니셨어요. 항상 부부동반으로 외출하시더군요. 은산 장에서도 두 분이 붙어 다니셨습니다.

 

용숙이 여동생이 중앙대 휴학과 복학을 번갈아했던 걸로 압니다. 제 아우랑 인천 집에 와 인사 하길래 관계를 물었더니 친구라고 하더군요. 얼굴에 미세한 흉터가 있어 후에 아우더러 묻자 교통사고로 죽을뻔 한 적이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마쪽에 큰 흉터가 있다고 했습니다.

 

류현숙!

보고 싶네요. 공부를 잘했는데... 저랑 현숙이랑 합수리 명숙이랑 선두를 다퉜습니다. 중학교 진학하여 무섭게 공부하더군요. 원래 머리가 좋은 아이였거든요. 훗날 명숙이는 대전여상 갔지만 현숙이는 대전여고에 진학했습니다. 대전여고와 대전여상은 분명히 다릅니다. 당시 저희 모교에서 대전여상에 진학한 이명숙, 이O자, 오창순은 오늘날 '주택관리사'를 면치 못하는 반면 현숙이는 캠퍼스 강단을 오르내리는 몸이 됐습니다. 아직도 공부하는 신분이라는 거죠.

 

근데 솔직히 초등학교 땐 제가 공부를 제일 잘했다고 확신합니다. 왜냐구요? 현숙이는 부친 류성돈 선생님 덕을 봤을 것이고, 합수리 이명숙은 부친 이정섭 어르신이 학교 육성회장이셨거든요. 그러니 아무 것도 아닌 제가 대등히 맞선 건 일등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하하...

 

1990년대, 제 두 번째 시집 출판기념회에 현숙이가 올라와서 만났습니다. 몹시 말랐더군요. 건강하라며 어깨를 두드려주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곤 지금까지 못봤어요. 소문엔 주말을 틈타 내대리 집에 체류한다 하더군요. 고향집 들러 여유를 누리다 간다는 풍문이었습니다.

 

동창 모임 날, 내지리에서 비닐하우스 농사 짓는 동창 이순자가 길에서 현숙이를 봤는데 승용차 문을 열고 눈웃음만 살짝 짓고 가더라며 서운해하길래

"차 몰고 가는 사람이 동창한테 인사하며 차에서 내리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바쁘면 미소만 던지고 지나칠 수도 있는 세상사 아닌가? 누구에게나 특성이 있듯이 현숙이가 눈웃음으로 인사를 했다면 충분하다고 봐. 그 앤 눈웃음이 포인트거든."

하고 말해주었지요.

 

가중리 이갑순 옹(翁)과 열연하여 '대한민국 민속문화 예술대전'에서 '백제 단(丹)잡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순자입니다.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다가도 '백제 단잡이'를 한다고 하면 삽이고 호미고 내던지고 적극 참여한다고 해요. 순자는 공부 실력은 꼴치쪽이었어도 달리기 하나는 명수였습니다. 달리기할 때처럼 맹렬히 사는가 봐요. 재미있는 고향 동창들입니다.

 

작년에 휴가 갔다가 빼내저수지에서 내지리 가는 도로로 차를 몬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 빼내저수지로 소풍 간 기억을 더듬으면서요. 길이 그때나 별 다름없이 낙후 방치되어 있더군요. 개발이 더뎌보였습니다. 하지만 언덕을 넘어 과수원 외딴집을 지나자 고속도로 공사로 마을 일부가 싹뚝 잘려져 있었습니다. 굴삭기 소리만 요란스레 들려왔어요. 망해쪽 현숙이네 동네도 달리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식 가옥도 띄었습니다. 현숙이네 집 주변에 조그만 저수지가 있었던 기억을 살려 한참 살폈답니다.

 

선배님,

전 선배님도 어렴풋이 그려집니다. 세범이 누님이니 그럴 수 밖에요. 그쪽 류가(柳家)들이나 저희동네 류가(柳家)들이나 감수성이 뛰어난 공통점을 인정할만 합니다. 고향 향한 그리움의 정도 비슷해 보입니다. 공부 못해 만날 선생님 면박을 도맡던 류상범은 잘 사는지... 10여 년 전 제가 동창회장 할 때 통화를 나눈 기억이 납니다. 세범이 사는 데서 머지 않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과거 어떤 이는 저와 성씨 유래에 대해 대화하면서 '류씨(유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성이라서 정통성이 불투명하다'라고 하더군요. 그 친구 부친께서 하신 말씀이랍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성씨 중 중국 체계를 떠나 명실공히 '홀로로드'를 답습해온 성씨가 어디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류가(柳家)는 고려 이전부터 막강한 지방호족으로 세(勢)를 누리다가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면서 수면위로 등장했습니다. 왕건은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호족의 딸들을 부인으로 삼습니다. 류가(柳家) 집안에서도 딸 둘이나 왕건에게 시집을 보냅니다. 왕건의 호족 견제정책은 반면 호족 방패막이 역할로 반작용되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 시대에 이르러 스스로 귀족인냥 뻐기고 사는 사람들은 조선 후기 양반사회가 붕괴되면서 지천에 널려있던 천민들이 과연 어느 성씨에 가장 많이 흡수되었는지에 대해 냉정히 고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호적의 정리는 박 대통령 시절인 1970년대 초반에도 한바탕 대대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김, 이, 박씨 성(姓)의 다층적 존립이 천, 방, 지, 추, 마, 골, 피, 개, 조, 지, 로, 구, 나 성씨의 소멸과 연관이 없다고 볼 수 없다는 설(說)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따로 시간을 내어 논하겠습니다. 

 

생각난 김에 류종범 선배에 대해서도 언급하겠습니다. 키 크고 잘 생긴 류종범 선배는 서울 영등포 바닥에서 타격(打擊)으로 권역(圈域)을 풍미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향에 큰 일이 생겼을 때 에쿠스, 채어맨 같은 차량 수 십대가 도로를 메웠다고 하더군요. 검정 양복의 깍두기들이 꽤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웬지 서글펐습니다. 아직도 유지광(柳志光) 같은 인물들이 있구나 하는 망상에 미치면서 말입니다.

 

제가 고향에 대해 남다른 시각을 갖는 이유는 고향이야말로 종극에 돌아가 묻힐 최후의 안식처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귀향(歸鄕)은 고향을 떠나올 때보다 더 힘든 것 같아요. 절대로 생각처럼 덥썩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하더라도 이 밤도 마음만은 고향으로 달립니다.

 

저도 가을 휴가 땐 신동 망해쪽 류가(柳家) 집성촌을 답사해보고자 합니다. 선배님의 건강과 댁내 화목을 빕니다. 아무쪼록 고향을 잊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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