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에 부동산 붐이 태동한다는 소식이다. 춘천에서 삼십분 거리에 있고, 남북 관계의 화해로 군사도시로만 인식되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점 등이 주된 이유라 한다. 양구는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간직하고 있다. 아담한 읍내엔 군인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읍내 저자거리를 돌며 관찰해보면 나름대로 엄연한 지역문화를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사실 군사도시는 외부인의 눈에 다소 경직된 형태로 보일 수 있으나 시장의 흐름이 일정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경제성 원리에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양구에서 군 부대를 배제하면 소재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양구를 떠올리면 설경(雪景)이 가장 먼저 그려진다. 일대가 온통 은세계로 눈부신 풍경들... 읍(邑)을 우회하는 남대천(南大川) 멀리 펼쳐진 산이 사명산이다. 사명산 너머 산곡(山谷)엔 월명리라는 촌락이 있다. 월명리는 파라호를 굽어보며 길게 형성된 마을로 한때 공비의 출현이 잦았던 지역이다. 우리도 그곳으로 여러 차례 수색과 매복작전을 나갔다.
꽝꽝 추운 겨울밤, 추위를 견디다 못해 민가로 내려가 주인에게 사정하여 웃방 한 칸에 전 대원들이 꼬깃꼬깃 들어가 몸을 녹이던 기억이 난다. 웃목에 고구마 둥가리가 있었던가? 틈새로 팔을 넣어 토실한 날고구마를 꺼내 대검으로 깎아 먹던 전우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명산 주령(主嶺)을 넘다가 쌀자루를 진 촌부(村夫)를 만나 배낭과 바꿔 지고 산을 넘은 적도 있다. 지게질에 익숙해있던 나로선 쌀자루 하나쯤이야 부담이 되지 않았다. 험준한 산세는 차마가 다닐 수 있는 노폭(路幅)과 실낱같은 지름길로 나뉘어진다. 인력 수송에 의존하는 쌀과 생필품은 대개 지름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차마 통행이 가능한 도로가 산간 협곡 지형을 따라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탓이다.
면회 온 아이랑 중화요리집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따뜻한 국물에 몸을 데우던 순간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지척의 <서울장여관> 쇼윈도우 간판... 그 여관 객실 창밖에도 눈은 쉬지 않고 내렸다. 그리하여 이튿날 동마장터미널로 향하는 금강여객 시외버스 운행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양구의 주말엔 지천이 군인과 면회객들이라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면회객들로 붐비던 읍내는 평일을 맞으면서 썰물 지나간 자리처럼 한산했고 예의 다름없이 군인들의 체계적이고 기계적인 일상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가끔 구암리 뒷산 태풍사격장에서 공지합동작전이 전개되기도 했다. 전투기가 고공에서 엔진을 끈 채 사격장 타켓을 향해 하강하다가 냅다 굉음의 화력을 뿜고 잽싸게 기수를 상향으로 지향하여 사라지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105mm 포(砲)에서 발사된 탄(彈)이 낙오되어 우리 숙영지 텐트 뒷편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105mm 포탄은 '쉬윙' 소리를 내며 공중을 가르곤 했는데 유심히 바라보면 탄두가 날아가는 게 눈에 보였다. 포병 출신 예비역들은 '낙오탄(落伍彈)'의 뜻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거리 좋고, 상탄(上彈)...."
어쩌고 하여 고참한테 얼차려 받던 포병부대 대원도 생각난다. 포병에게 '거리 좋고, 상탄'이란 말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거리 좋고, 우탄(右彈)' 혹은 '좌탄(左彈)'이란 개념만이 성립되는 것이다.
양구에 부동산 붐이 일면 어떻게 될까? 한없이 순박한 지역 정서는 어떻게 될까? 광치령과 대암산, 양구터널, 백호터널, 소양호 나루터 같은 것들이 그려진다. 여우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산간 오지... 양구도 세인의 무관심에서 깨어나 세상의 이슈로 등장할 것인가?
내 삶에 기적이 있어 그 시절로 돌아가 면회 온 아이랑 밤을 새우며 양구의 밤하늘을 얘기할 수 있다면...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밤, 따스한 체온과 향기로운 체취에 젖어... 세속의 인간사에 그런 일이 있을까마는 마음만은 여전히 추억의 흥분과 설렘에 사로잡혀 불타고 있다.